난 지금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서대문에 있던 서대문극장에서 악동의 미소를 짓는 코주부 장-폴 벨몽도가 나온 ‘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1959)를 보고 느낀 형언할 수 없었던 희열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낮에 극장 문을 나서자 영화에서 미셸(벨몽도)이 인상을 쓰면서 쳐다보던 태양이 나를 덮치면서 나와 미셸을 분간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경이적이자 신세계적이며 황홀하기까지 한 감동이었는데 난 그 때 느낀 인상이 하도 강해 그 날 내가 청바지에 소매가 긴 남방셔츠를 입었다는 것까지 기억한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계 흐름에 획기적 분수령이 된 뉴웨이브의 효시작인 이 영화는 장-뤽 고다르의 첫 영화로 형식은 미 갱영화 스타일이다. 그러나 내용과 기술면에서 그 때까지 전연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이자 도전적이며 또 매력이 듬뿍 담겨 있는 작품이다.
특히 장면과 장면 사이를 과감히 뛰어 넘는 점프 컷이 보는 사람의 시각과 마음까지를 어지럽게 하는데 이와 함께 라울 쿠타르의 파리 거리를 생생하게 담은 흑백 촬영이 아주 로맨틱하다. 미셸의 쇼트컷을 한 미국 유학생 애인 패트리샤(진 시버그)가 샹젤리제에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하며 신문을 팔던 장면이 눈에 삼삼하다. 아마도 나의 파리에 대한 동경은 이 때 싹 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인 가장 큰 까닭은 벨몽도 때문이다. 페도라를 쓰고 재킷을 입은 벨몽도가 두꺼운 입술에 담배를 물고 희죽이 웃는 모습에 대뜸 말려들고 만다. 막강한 흡인력인데 그는 또 엄지손가락 안으로 입술을 좌우로 문질러대는 독특한 제스처를 써 그 뒤로 나도 한동안 그 제스처를 흉내 냈었다.
벨몽도는 영화에서 경찰을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로 나오지만 결코 그가 밉지 않다.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놈’인데 바로 이 같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나는 양면성이 그의 매력이다.
당시 실존주의 기운과 소외 의식 그리고 체제에 대한 반항을 잘 나타낸 이 영화로 벨몽도는 대뜸 세계적 스타가 되었고 반영웅이요 반항하는 청춘의 상징이 되었다.
벨몽도는 생애 80여편의 갱영화, 액션모험 영화, 드라마 및 코미디 등 전 장르에 걸쳐 맹활약을 했는데 이 중에는 타작도 적지 않지만 그가 끝까지 탑스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밉지 않은 악동의 이미지 탓이다.
지난 16일 스크린에서 처음 본 뒤로 근 40년만에 벵몽도(77)를 실제로 만난 나는 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기자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가 2009년도 생애업적상 수상자로 벨몽도를 선정, 그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이 날 우리의 리셉션에 참석했다.
검은 셔츠에 줄무늬 회색 상의를 입은 벨몽도는 은발에 주름이 굵게 진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장난기 심한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벨몽도는 그러나 9년 전에 뇌일혈로 쓰러진 뒤로 몸의 오른 쪽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여서 이 날도 양쪽에서 두 젊은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식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 두 여인 중 하나가 벨몽도가 몇 년 전 만난 새 애인인 이탈리안 바바라 간돌피(34)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 나이에도 젊은 여인을 둘씩이나 대동한 그는 과연 프랑스 남자답다고 하겠다.
식이 시작되기 전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만나서 너무나 반갑다. 난 옛날부터 당신의 팬이다”면서 인사를 했더니 벨몽도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로 응했다. 내친 김에 그와 함께 기념사진(사진)을 찍었다.
내 자리에 돌아와서도 뭔가 아쉬워 이번에는 식순이 적힌 팸플릿을 들고 다시 그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만나서 정말 반갑다”고 말한 뒤 사인을 부탁했다. 그는 왼손으로 내가 내민 팸플릿에 ‘JPBelmondo’라고 적은 뒤 “발라”(Voila)라며 그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갓 블레스 유. 메르시”라고 답한 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 날 참석자들의 기립박수 속에 자리에서 일어선 채 기념패를 받은 벨몽도에게 패를 준 사람은 벨몽도와 두 편의 영화에서 공연한 캐나나 태생의 여우 즈느비에브 뷔졸드. 벨몽도는 불어로 “비평가들이 나를 자주 혹평했는데 이렇게 비평가들로부터 표창을 받으니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벨몽도는 지난해 신체 부자유스런 노인인 자기 모습 그대로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움베르토 D’를 리메이크한 ‘남자와 그의 개‘에 나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는 관객과 비평가들의 미지근한 반응을 받았다. ‘롱그 비 무슈 벨몽도!’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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