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것에는 모든 것을 흡수해 무기력화 시키는 치사성 아름다움이 있다. 검은 것 속에는 비밀과 관능성과 숙명이 도둑처럼 숨어 있어 육감적인 매력마저 느낄 수 있다. 범죄의 색깔로 검은 색이 어울리는 것도 이 까닭이다.
‘느와르’는 프랑스어로 검은 것을 뜻하는데 단어를 발음해 보면 로맨틱하게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옛날에 서울 명동에 ‘느와르’라는 다방이 있었는데 나는 그 이름이 좋아 자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느와르’가 붙은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필름 느와르’다. 이 말은 프랑스 영화 비평가들이 지난 19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중반까지 할리웃이 양산한 범죄영화에 붙여준 이름이다. 이 장르는 2차 대전 후 전쟁의 심리적 후유증과 허무주의 그리고 냉전과 핵의 공포를 의식해야 했던 미국인들의 심리와 함께 그들의 정부를 비롯한 제도에 대한 불신과 부정을 반영하고 있다.
‘필름 느와르’ 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당시 유행한 펄프 픽션 범죄 소설들. 미키 스필레인, 레이몬드 챈들러 및 대쉬엘 해밋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로 이들 글의 무대는 대부분 LA였다. ‘필름 느와르’ 영화들은 철저하게 냉소적이요 염세적으로 고독이 안개(영화에서도 실제로 안개가 많이 사용된다)처럼 자욱이 끼여 있다.
범죄자와 남자 잡는 치명적 여인과 범죄자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사립탐정이나 형사가 주인공으로 이들은 서로 탐욕과 집념에 얽매여 운명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비극을 맞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현대음악 작곡가로 미니멀리스트인 존 애담스(62·사진)가 작곡한 오케스트라 신곡으로 ‘캘리포니아의 풍경과 경험과 문화를 주제로 다룬’ 그의 3부작 중 마지막 편에 ‘시티 느와르’(City Noir)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LA가 ‘느와르’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애담스는 음악에서 ‘필름 느와르’ 영화를 통해 표현된 1940년대 말과 50년대 초의 LA의 환경과 진로를 묘사하고 있다. 나는 지난달 27일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 필이 연주하는 ‘시티 느와르’를 들으러 갔는데 재즈 색채가 다분히 묻어 있는 음악이었다.
트럼핏과 색서폰과 트럼본 등 금관악기와 봉고를 비롯한 각종 타악기들이 큰 역할을 했는데 이들 악기들은 재즈성이 강한 ‘필름 느와르’ 영화음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올해 LA 필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구스타보 두다멜을 비롯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날 프로는 LA 필이 마련한 현대음악 제전인 ‘웨스트 코스트, 레프트 코스트’(12월8일까지 각종 현대음악 공연)의 첫 프로로 ‘시티 느와르’는 에너지가 풍성하면서도 서정적이었다.
제1악장 ‘도시와 그것의 대역’은 무드 짙은 재즈 풍으로 내장을 꺼내 물에 씻듯 통렬했다. 제2악장 ‘노래는 당신을 위한 것’에서는 솔로 색스와 트럼본 그리고 트럼핏이 ‘필름 느와르’의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특히 트럼핏이 밤의 고독한 멜로디를 청승맞게 내뱉었다.
제3악장 ‘블러버드 나이트’에서는 트럼핏과 색스가 로맨틱하고 우울한 소리를 내더니 이어 봉고 음이 저돌적으로 질주하면서 마침내 화산이 폭발하듯 끝을 장식했다. 두다멜은 역동적이요 기운차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갔는데 현대 음악인데도 매우 친근감이 가는 강렬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나올 ‘필름 느와르’ 영화에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레퍼터리는 살로넨이 지난 1996년 LA 필을 위해 작곡한 ‘LA 변주곡’과 루 해리슨의 4악장짜리 피아노협주곡(LA 초연) 및 ‘시티 느와르’로 짜였는데 ‘시티 느와르’도 좋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도록 화끈했던 것은 해리슨의 곡이었다.
이 곡은 해리슨(2003년 사망)이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릿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날 연주는 현대음악 해석에 뛰어난 이탈리안 마리노 포르멘티가 했다. 현대음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서정적이면서 또 고전음악 풍으로 아시안 색채가 많이 채색돼 있다.
희롱하듯이 아름다운 제1악장에 이어 이 날 나와 만당한 청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간 제2악장이 연주됐다. ‘스탬피드’(소나 말 떼가 놀라 우르르 도망침)라는 악장의 제목처럼 시종일관 질풍노도처럼 달리고 구르고 포효했는데 악장의 마지막은 포르멘티가 손바닥과 팔뚝으로 건반을 두드리면서 끝이 났다. 웨스턴에서 보던 스탬피드와 아메리칸 인디언과 미 기병대의 도주와 추격이 머리에 그려졌다. 쇼맨십이 대단한 아찔하고 장렬하도록 멋진 연주였다.
내가 보기엔 두다멜의 지휘는 힘과 정열은 가득하지만 세련미가 모자라 보인다. 이제 나이 28세니 세련미를 갖추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젠 좀 그만 LA 필이나 미디어들이 두다멜을 록스타 팔아먹듯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두다멜이 다칠까 걱정된다.
박흥진 /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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