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극팬이 아니어서 과거 본 작품이 별로 없는데 이런 내게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어준 사람이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장 필 버크다. 그는 나를 HFPA 회원이 되도록 스폰서를 서준 사람이기도 한데 연극광이다. 내가 몇 달전 뉴욕에 갔을 때 링컨센터에서 뮤지컬 ‘남태평양’을 함께 구경한 사람도 필이다.
이 달 중순 프레스 정킷차 런던에 갔을 때도 나는 필과 같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올드 빅극장에서 연극 ‘바람의 유산’(Inherit the Wind)을 봤다. 도착한 날이어서 피곤했지만 올드 빅에서 오스카상을 탄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하는 연극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이 작품을 스탠리 크레이머가 감독하고 왕년의 두 거물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프레데릭 마치가 공연한 영화로 로 봤을 때 깊은 감명을 받아 무대극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났다.
연극을 볼 때까진 시간이 많이 남아 튜브(지하철)를 타고 워털루 브리지를 찾아 갔다. 내가 런던에 갈 때면 이 다리를 찾아가는 것은 순전히 비비언 리와 로버트 테일러의 비련의 영화 ‘애수’(Waterloo Bridge-비록 영화는 할리웃서 찍었지만) 때문이다. 센티멘탈 저니인 셈이다.
영화에서 리가 귀향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몸을 팔던 워털루 브리지 인근의 올드 빅은 200년 된 1067석 규모의 3층짜리 극장으로 과거 주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 했었다. 극장을 찾아간 날은 평일인데도 초만원을 이뤘다. 지난 2003년부터 올드 빅극단의 예술감독직을 맡고 있는 스페이시가 기자회견서 “작년 같은 불황 속에서도 올드 빅은 흑자를 냈다”고 자랑할만도 했다.
‘바람의 유산’은 1925년 테네시의 데이턴에서 있었던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다 기소된 공립학교 선생에 관한 실화 법정 드라마다. 제목은 잠언 11장 29절에 나오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는 귀절에서 따온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언론이 ‘원숭이 재판’이라고 부른 이 미사법사상 희대의 소극은 당시 법조계의 두 거인이었던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와 검사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간의 설전이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법정 대결로 남아 있는 재판이다.
브라운은 당시 최고의 진보적 변호사로 박학다식한 약자의 친구였고 근본주의 기독교 신자인 브라이언은 세차례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갔던 거물이다. 그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지극히 염려해 재판의 검사역을 자청했었다.
연극에서는 대로와 브라이언의 이름이 각기 헨리 드러몬드와 매튜 해리슨 브레이디로 바뀌었다. 연극의 절정은 드러먼드가 브레이디를 증인석에 앉힌 뒤 그의 창조론에 대해 집요한 질문공세를 펴면서 브레이디를 궁지에 몰아 넣는 부분이다. 둘이 늙은 사자들 처럼 서로를 향해 으르렁 대는 광경이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도 코믹한데 드러먼드역의 스페이시와 브레이디역의 데이빗 트러턴이 불꽃 튀기는 연기 대결을 했다.
특히 백발 가발을 쓴 스페이시가 육신은 노쇠하나 신념과 영혼은 뜨거운 노변호사의 연기를 노련하고 중후하며 때로 간교한 동작과 제스처로 감동적으로 표현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기와 내용과 세트 등 모든 것이 훌륭한 연극이었다. 너무 피곤해 연극 전반부에서는 약간 졸았으나 드러먼드와 브레이디의 격돌 장면이 나오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연극을 보는 재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스페이시는 공연 이튿날 가진 기자회견(그가 조연한 영화 ‘염소들을 응시하는 남자들’)에서 “나는 자신을 늙은 사자로 표현하려고 했다”면서 “내게 있어 이 작품은 창조론대 진화론의 대결이라기 보다 사고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25명이 넘는 배우들이 대사를 말하는 연극이어서 이 작품을 브로드웨이로 옮겨 공연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LA로 돌아 오기 전 날 모처럼 해가 얼굴을 비춰 청명한 가을 날씨 속에 런던 시내를 걸었다. 하이드 파크를 거쳐 피카딜리 서커스와 트라팔가광장을 지나 버킹햄궁에 도착했다. 궁을 지키는 바비(영국 경찰)에게 수상관저인 다우닝가 10을 물으니 친절히 가르쳐 준다. “댕큐 베리 머치”라고 했더니 “대츠 올 라이트”라고 응답했다.
다우닝가로 가던 중 하이드 파크 병영의 여왕 기마수비대의 점검식을 구경하고 이어 16세기에 지은 웨스트민스터 애비(영국 건물들은 웬만하면 몇 백년씩 묵은 것들이다)와 스카틀랜드 야드를 보고 숙소로 돌아 왔다. 4시간의 산보였다. 1850대에 문을 연 ‘팩스턴스 헤드’ 퍼브에 들러 100년 넘는 누룩으로 만든 생맥주 ‘올드 스페클드 헨’으로 여객의 피곤을 헹군 뒤 호텔로 들어 갔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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