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 감독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홍상수는 직접 만나보니 사람이 아주 어눌했다. 자기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김태우처럼 우물우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이런 어눌함은 순전히 외적인 것이고 속은 아주 도사다.
지난 17일 LA카운티 뮤지엄과 영화진흥위 미주사무소(소장 문선영)가 함께 마련한 8편의 자기 영화 회고전을 위해 LA에 온 홍상수를 기자회견에서 만났다. 모양이나 복장이 약수동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라기보다 시골 청년 같아 친근감이 갔다. 48세라기엔 너무 젊어 보였는데 장난꾸러기처럼 생겼다. “반갑습니다. 수고들 많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데 태도뿐 아니라 말도 우물우물하는 식이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남자는 여자보다 한 수 아래인 줏대 약한 다 큰 아이들처럼 묘사되는데 홍 감독은 이에 대해 “소위 잘난 사람들에게선 영화적 거리를 얻을 수가 없어 그런가 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회견을 하면서 느낀 것은 그의 대답이 부처님 말씀처럼 오묘한 것 같으면서도 아주 애매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그 건 그 사람 생각이지요”라는 식으로 두루뭉실 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사람들이 나와 그저 먹고 마시고 담배 태우고 만나고 섹스하고 헤어지고 하면서 말들이 많아 골수팬들만이 본다. 최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국 관객은 4만~6만 정도라고 본인이 밝히면서 “제 영화는 많이들 안 봐요”라고 천연덕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영화를 선택해 극장엘 오는 것이어서 6만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 영화계의 문제점을 과다한 제작비라고 지적하는 홍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제작비를 가급적 줄이려고 애쓰면서 한 사람으로부터 500만원씩을 받아 제작비를 충당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를 좋아하는 배우들이 무보수로 나와 큰 도움이 된다고.
홍 감독의 영화는 우리 주변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상생활의 얘기다. 그의 영화의 대사나 배우들은 모두 우리가 버리다시피 하는 일상 대사요 길가다 우연히 만난 행인들과 같다. 그런데 그는 이런 구태의연한 것들을 마치 명 셰프가 같은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듯이 재치 있고 지혜롭게 뒤섞어 새롭고 통찰력 있게 표현해 낸다.
홍상수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제대로 파악치 못하고 있는 상식적인 것들의 속살을 들춰내 보여준다. 알 듯 모를 듯한 일상의 먼지 묻은 표면을 말끔히 닦아줘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아 그게 바로 이거였구나”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가 막연하게 끝나는 것은 그가 인생문제의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오다가다 겪는 하찮은 일상의 조각에서 얻는다고 한다. 그는 각본을 자신이 쓰는데 이런 작은 시작이 세포분열 하듯이 확산되며 작품이 완성된다.
홍상수를 흔히 프랑스의 누벨바그 감독 에릭 로머에 비유하는데 그는 이에 대해 “나는 로머를 매우 좋아하고 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만들 때 결코 그를 머리에 떠올려 본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자기 영화는 모든 것이 꼭짓점을 향해 있는 삼각체가 아니라 누구든지 들어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취할 수 있는 원구와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떻게 보면 모두 엇비슷하다. 그리고 때로 그의 삶과 사랑에 대한 반복되는 회의에서 퇴폐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영화가 폭이 좁고 그게 그 소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영화를 피천득씨가 청자연적이라고 말한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소리들 같지만 그 것을 매번 살짝 비틀어대 모양과 내용을 맵시 있게 바꿀 줄 안다. 예지로운 영화 수필가이다. 지금 문소리(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를 써 만든 ‘하 하 하’의 마지막 작업을 하고 있는 홍 감독은 소재만 있다면 자기가 공부를 하면서 살았던 미국에서(뉴욕은 너무 비싸 LA나 샌프란시스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18일 할리웃에 있는 공동묘지 할리웃 포레버(루돌프 발렌티노와 타이론 파워 등이 묻혀 있다)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홍 감독을 다시 만났다. 술은 소주 1병반이 정량이라는 그는 눈병으로 맹물만 마시고 있었는데 여독이 안 풀려서인지 아니면 대인 기피증이 있어서인지 인사말만 하고 우물우물 파티장을 빠져 나갔다.
리셉션장을 나와 묘지가에 앉아 쉬고 있는 홍상수에게 다가가 작별의 악수를 나눴다. “다음에 만나면 소주나 한 잔 하자”는 그의 말이 그의 영화 속 대사처럼 정답게 들렸다. 그럽시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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