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약을 파는 약장수가 있었다. 약장수는 자기 약을 먹으면 해수에서 야뇨증에 이르기까지 만병이 낫는다고 천상유수로 늘어놓으면서 약을 팔았는데 물론 이것은 모두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언변에 놀아나 약들을 사곤 했다.
그러나 이들 약장수들이 딱 하나 못 고치는 병이 있으니 그것은 상사병. 상사병은 사랑의 묘약만이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을 팔아먹은 약장수가 도니제티의 로맨틱 코미디 오페라 ‘사랑의 묘약’(The Elixir of Love)에 나오는 자칭 닥터인 둘카마라이다.
둘카마라는 자기 실력은 우주가 알아준다면서 자기 약은 당뇨에서부터 벼룩과 쥐까지 퇴치하고 우는 과부를 1주일 만에 웃게 만들고 칠순 노파에게 젊음의 미(그 때 벌써 보톡스가 있었나보다)를 되돌려준다고 허풍을 떨어대는데 이 허풍에 놀아난 젊은이가 시골 총각 네모리노다.
‘동네 바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순진한 네모리노는 동네의 지체 높은 집 딸 아디나를 짝사랑하는데 아디나가 자신의 구애를 퇴짜 놓자 둘카마라로부터 사랑의 묘약을 산다.
일자무식의 네모리노가 사랑의 묘약을 알게 된 것은 아디나가 동네 처녀들에게 읽어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얘기를 통해서였다. 트리스탄과 그의 삼촌인 마르케 왕의 신붓감인 이졸데는 이졸데의 하녀가 몰래 타준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비극을 맞게 된다. 그러니까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전에 도니제티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있었던 셈이다.
여하튼 네모리노는 둘카마라가 판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데 이 묘약이 신통력을 발휘,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러나 네모리노가 마신 사랑의 묘약은 실은 둘카마라가 마시다 남긴 보르도 포도주.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인데 결국 사랑의 묘약이란 환상적 최음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의 묘약의 효과와 그 허상을 처음 배운 것은 대학생 때 들은 영국의 록그룹 서처스가 부른 ‘러브 포션 넘버 9’을 통해서였다. 여자 사귀는 재주가 없는 젊은이가 금으로 덮어 쓴 이빨을 한 집시를 찾아가 그가 만들어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먹물 색깔의 사랑의 묘약 제9번을 마신 뒤 황홀무아지경에 빠져 보이는 것마다 닥치는 대로 키스를 하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당시 한국에서 빅히트를 해 음악 감상실과 다방에서 뻔질나게 틀어댔었다.
지난 12일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개막된 2009~2010년 시즌 첫 작품인 ‘사랑의 묘약’은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또 경쾌한 음악과 노래로 만들어진 벨 칸토(아름다운 노래) 오페라다.
미성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그래서 네모리노의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은 베니아미노 질리와 유시 뵤를링 그리고 티토 스키파와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서정적 음색을 지닌 테너의 노래로 들으면 감칠맛이 난다.
이 날 오페라의 공연은 모든 것이 중간 수준이었다. 당초 네모리노와 둘카마라 역을 맡기로 했던 테너 롤란도 비야존과 베이스 루제로 라이몬디가 각기 성대 문제와 리허설 중에 입은 부상으로 주세페 필리아노티와 조르지오 카오두로로 교체된 것부터가 특히 비야존의 노래를 기대했던 내겐 유감이었다.
필리아노티가 부른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은 매우 평범한 것으로 리바이벌인 이 오페라의 원전인 1996년도 판에서 네모리노 역을 맡았던 라몬 바가스의 감미롭고 향취 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필리아노티의 음성은 어딘가 불안정했다
아디나 역의 소프라노 니노 마차이제도 무난한 노래 솜씨였다. 보통 음역에서는 괜찮았지만 고음에 오를 때면 소리가 갈라졌다. 마차이제는 웃고 교태를 부리는 연기가 오히려 낫다.
두 주연 가수가 음성과 카리스마 면에서 모두 극적으로 강렬한 느낌과 인상을 주지 못하는 보통 수준에 머물러 아쉬웠다. 네모리노의 라이벌인 벨코레 상사 역의 바리톤 네이산 건도 무난했는데 가장 들을 만한 것은 카오두로의 노래였다. 다채로운 음성으로 돌파리 약장수 역을 잘 소화해 냈다. 제임스 콘론이 신이 나서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는 생동감과 은근함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시즌 개막작으로는 다소 초라한 편이었다. 어쩌면 LA 오페라가 지난 시즌부터 시작한 바그너의 ‘링’사이클 공연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묘약’은 오는 30일까지 공연된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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