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는 내게 있어 응시의 도시다. 토마스 만의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리도 섬의 호텔에 묵는 중년의 소설가 구스타프 폰 아쉔바하가 아드리아 해변에 나갔다가 목격한 미소년 타지오를 동경하는 응시가 그 하나다.
또 다른 응시는 영화 ‘여정’(Summer-time)에서 베니스에 놀러와 산마르코 광장의 노천카페 플로리안에 앉아 있는 미국인 노처녀 제인(캐서린 헵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탈리안 유부남 골동품상 레나토(로사노 브라지)의 것이다.
나는 지난 주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이 두 개의 응시의 장소에서 그동안 내가 안으로 간직해 두었던 베니스에 대한 동경을 마침내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베니스 공항서 수상버스로 1시간 거리)에서 몇 차례 타지오가 놀던 카바나가 줄지어 선 해변을 거닐며 아쉔바하의 절대미에 대한 간절한 응시를 이탈리아의 내려쬐는 뜨거운 햇볕처럼 전신으로 감지했다.
어렸을 때 ‘여정’을 본 뒤로 난 베니스 하면 대뜸 산마르코 광장의 카페 플로리안을 마음에 떠올리곤 했었다. 오전 중에 영화를 두어 편 보고 리도의 숙소에서 수상버스로 30분가량 달려 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카페 플로리안을 찾아갔다. 건너편 다른 카페에서 5인조 악단이 ‘여정’의 주제곡을 연주한다. 결국 왔구나 하는 거의 허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광장을 바라보며 레나토가 앉았음직한 자리에 앉아 케이트를 찾아보았지만 허구 속 여인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카페에 앉아 맥주와 포도주를 마시면서 광장의 낭만을 감상하는데 음악 감상료가 1인당 6유로라는 먹고 사는 엄연한 사실이 웨이터에 의해 전달됐다.
썩어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베니스에서 깨달았다. 베니스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부식과 쇠락의 미와 장엄과 낭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베니스를 걷는다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이다. 둘이 나란히 서면 꽉 찰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운하 위의 다리를 건너면 성당과 식당과상점이 있는 광장이 나타기를 계속한다. 음모를 품고 있는 듯한 골목들이 이방인을 어둡게 유혹한다.
케이트가 뒷걸음질 치며 휴대용 촬영기로 촬영을 하다가 운하에 풍덩 빠졌던 산바나바 성당을 찾아 길을 물어 골목과 다리를 건너가는데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물 위의 집들 창밖으로 빨래들이 줄줄이 내걸렸다. 이탈리아 영화에서 많이 본 광경이다.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가 운하를 지나가는데 사공이 셀폰으로 통화를 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정답다. 손님 앞에서는 맹인 아코디언 악사의 반주에 맞춰 가수(?)가 ‘볼라레’를 열창하는데 노래 솜씨가 별로다. 어떻게 보면 관광지란 먼발치에서 동경할 때가 더 낭만적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산바나바 성당에 도착, 케이트가 물에 빠졌던 곳을 사진으로 찍고 광장의 노천카페에 앉아 ‘여정’의 달콤 씁쓸한 못 이룰 사랑의 분위기를 맥주와 함께 들이마시니 노곤한 몸에 취기가 감돈다. 케이트처럼 나도 장소에 취하고 마는가 보다.
광장의 유명한 비둘기 떼만큼이나 많은 관광객들 중에 한국인들도 꽤 보인다. 이탈리안 식당 웨이터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할 정도로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나 보다. 이탈리안들은 한국인들처럼 굉장히 시끄러운데 그들은 제스처까지 요란해 더 시끄러운 것 같다.
리알토 다리도 보고 아카데미아 다리(인기 있는 리알토보다 여기서 바라보는 대운하의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다)도 보았지만 내겐 카페 플로리안에 앉아 바라보는 산마르코 광장이 최고다. 체류 중 바쁜 일정에 틈을 내 세 번이나 광장을 찾아갔는데도 더 보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 마침 뜬 만월이 바다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 곳은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광장 곳곳서 정열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의 모습이 영화 장면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베니스는 좋은 수채화 감이다. 화폭 대신 뇌리와 가슴에 베니스를 그려 넣고 그 곳을 떠났다. 시간과 장소가 모두 아쉽고 아까웠다.
내 친구 C는 베니스 여행 전 내게 ‘만과 바그너가 죽은 베니스는 네게 죽을 만한 장소가 될 것이다’라는 짤막한 글을 보내 왔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남쪽까지 내려갈 필요가 뭐 있을까. 베니스야 말로 보고 죽어도 될 도시였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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