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최고의 바그너 가수인 스웨덴 태생의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슨에 이어 자기 세대 최고의 브륀힐데(바그너의 오페라 ‘링’ 사이클의 신 보탄의 딸)라 평가를 받았던 독일 태생의 드러매틱 소프라노 힐데가트 베렌스(Hildagard Behrens·사진)가 지난 18일 일본 여행 중 뇌출혈로 도쿄서 사망했다. 향년 72세.
미모에 연기파요 극적 강렬성을 지닌 음성의 소유자였던 베렌스가 오페라 스타로 부상하게 된 것은 지난 1977년 카라얀에 의해 선정돼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Salome)에서 주연을 맡으면서였다.
나는 지난 1998년 1월 LA 오페라 공연으로 베렌스가 노래하는 ‘살로메’를 관람했었다. 성경에 나오는 요부 살로메는 새파랗게 젊은 여자인데(아마도 틴에이저였을 것이다) 당시 베렌스는 61세였다.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 과연 ‘할머니’ 베렌스가 손녀벌인 살로메 역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염려를 했었는데 공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베렌스는 알몸에 투명한 피부색 바디 수트를 입고 무대 위를 대굴대굴 구르면서 자기 몸을 버리다시피 하는 맹렬한 연기를 했는데 보면서 저러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를 했었다. 그의 연기는 베테런답게 정열과 힘이 넘쳐흘렀다.
높고 맑고 또 강렬한 음성으로 살로메의 구애와 절망과 복수와 집념을 불타듯 아름다우면서도 전율을 느낄 만큼 표독스럽게 노래했다. 그의 나이를 잊게 만든 관능적이요 화끈한 무대였다.
살로메가 벌거벗다시피 한 세례 요한의 모습을 보고 “당신의 육체가 나의 욕망을 깨운다”면서 그의 피부와 머리칼과 입술을 찬미하는 모습은 육욕에 눈이 먼 여인의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첫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의 갈구와도 같았다.
요한에게 “포도주보다 더 붉은 당신의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고 애걸복걸하다가 퇴짜를 맞은 살로메는 복수의 화신이 돼 헤롯왕에게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 달라”고 악을 써대다가 마침내 은쟁반에 담아온 요한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환희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여서라도 제 것으로 취하고야 말겠다는 여인의 집념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여자를 화내게 하지 말지어다.
오페라 ‘살로메’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이 살로메가 자기를 탐하는 헤롯 앞에서 추는 ‘일곱 베일의 춤’. 욕정과 집념과 원한에 만취해 온 육신을 큰 바람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어대는 살로메의 선정성과 광기나 다름없는 율동을 이국적인 멜로디와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묘사한 음악이다. 그래서 자주 이 곡은 따로 연주되기도 한다.
섹스와 피로 얼룩진 살로메의 얘기는 육체적 종교적 집념과 퇴폐적 향락주의 그리고 가학적 야만성을 지닌 야단스런 내용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의 좋은 창작의 소재가 되어 왔다. 하이네 등 여러 작가와 다빈치 등 여러 화가의 작품 소재가 되었고 영화로도 테다 배라가 나온 무성영화(1918)를 비롯해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 글래머 스타 리타 헤이워드가 나온 ‘살로메’(1953). 여기서 헤이워드는 붉은 머리채를 휘날리며 투명한 베일로 감싼 나긋나긋한 육체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 욕정으로 숨이 가쁜 헤롯(찰스 로턴)을 완전히 무기력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런데 성경 내용을 수정한 영화에서는 살로메가 요한을 구하려다 실패한 뒤 예수의 복음에서 구원을 찾는다. 살로메의 애인으로는 미남 스튜어트 그레인저가 나온다.
그리고 명장 빌리 와일더가 만든 명화 ‘선셋대로’에서 미쳐버린 무성영화 시대의 빅스타 노마 데스몬드(글로리아 스완슨-얼마 전 사망한 테드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의 정부)가 라스트신에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연기하는 여인의 모습도 살로메의 것이다.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는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시극본을 바탕으로 만든 1막짜리.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초연됐는데 과격하고 자극적인 내용 때문에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살로메’는 1907년 메트 무대에 데뷔했으나 이런 이유로 단 1회 공연 후 막을 내렸다.
1937년 북독 바렐-올덴부르크에서 출생한 베렌스는 1971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무대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한 뒤 30여년을 노래했다. 특히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메트에서 브륀힐데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베렌스는 1976년 푸치니의 ‘일 타바로’로 메트에 데뷔한 이래 1999년까지 무려 177번이나 여기서 노래를 불렀다. 메트 대표작들로는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와 ‘이도메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 및 푸치니의 ‘토스카’ 등이 있다. ‘슐라프 구트(Schlaf Gut) 디바.’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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