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는 좀 굶어도 괜찮지만 영화를 안 보면 정신적으로 허기가 지는 나 같은 영화 미치광이에게 LA카운티 뮤지엄(LACMA)의 주말 영화 시리즈 폐지는 충격을 너머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다.
마이클 고반 LACMA 관장은 지난달 28일 지난 1972년부터 계속돼 온 미술관 내 리오 S. 빙극장에서의 주말 영화 시리즈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관객의 감소와 이로 인한 적자운영 때문인데 미술관 측은 지난 10년간 총 100만달러의 적자를 봤다고 밝혔다.
LACMA의 프로는 할리웃의 클래식과 외국영화 그리고 유수한 감독 및 배우들의 작품 상영으로 짜여 빙 극장은 영화를 사랑하는 앤젤리노들의 주말 안식처와도 같은 구실을 해왔다.
나도 빙 극장의 단골 중 하나로 야수지로 오주의 ‘도쿄 이야기’와 주제가 ‘아모레 미오’로 유명한 이탈리아 범죄물 ‘형사’ 그리고 켄지 미조구치의 영화도 다 여기서 봤다. 내가 이 극장에서 본 영화 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5주말에 나누어본 크리스토프 키슬로스키 감독의 10계명을 현대적 우화로 만든 ‘데칼로그’였다.
LACMA는 영화 시리즈를 열면서 종종 관객들과 상영작의 감독이나 배우들과의 대화시간을 마련하곤 했는데 몇 년 전 홍상수 시리즈를 했을 때 홍 감독이 참석했었다.
LACMA의 이안 버니 영화부장은 한때 상영 프로를 위한 비평가 시사회를 열었었다. 대만감독 차잉 밍-리앙의 회고전 시사회 때는 나와 현 뉴욕타임스의 비평가인 마놀라 다기스와 단 둘이 큰 극장(총 600석)에 앉아 구경을 했었다.
이로 인해 나는 버니와 알게 됐는데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빙 극장에서 찾아보기가 힘드느냐”고 묻곤 했었다. LACMA에서 지난 13년간 일해 온 버니는 이번 조치로 정규사원에서 파트타임 자문으로 밀려났다.
고반 관장은 비록 주말 영화 시리즈는 폐지했지만 가능하면 내년 봄부터 미술품 전시처럼 기부자들로부터 돈을 받아 영화를 상영하는 식의 프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과연 영화 상영을 위해 목돈을 낼 사람이 있을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지난 1일 영국 배우 제임스 메이슨 시리즈를 끝낸 주말 시리즈는 오는 10월2일부터 7일까지 계속되는 ‘알랭 르네의 클래식 영화’들로 막을 내린다.
고반의 시리즈 폐지 발표 후 LA타임스의 영화비평가 케니 투란은 “왜 하필이면 영화 프로를 폐지하느냐”면서 “이번 조치는 영화를 사랑하는 앤젤리노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내 미술관에서의 영화 상영은 지난 1930년대부터 있어 왔는데 아무래도 미술 전시보다는 한 등급 아래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LACMA의 조치도 결국 이같은 발상에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LACMA의 이번 조치가 충격적인 것은 이 시리즈 폐지가 영화의 메카인 할리웃이 있는 LA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졸업’과 ‘아메리칸 히스토리 X’를 제작한 로렌스 터만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곳은 영화사의 동네로 미국의 타 지역 모든 미술관이 영화 상영을 폐지한다 해도 여기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한탄했다.
한편 고반 관장은 LACMA 이사로 있는 명제작자 브라이언 그레이저와 전 워너 브라더스 사장 테리 시멜의 줄을 이용해 할리웃으로부터 돈을 거둬낼 생각을 구상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성사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할리웃의 클래식과 외국 영화들이 관객을 못 찾아 고전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내가 미국에 온 1980년대 초만 해도 LA 곳곳에는 이런 영화들만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곳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즐겨 찾던 곳은 맥아더팍 인근에 있던 배가본드 극장으로 여기서 어린 아들과 함께 곤 이치가와 감독의 기록영화 ‘도쿄 올림피아드’를 봤다. 배가본드는 오래 전에 문을 닫았다.
또 다른 극장은 선셋에 있는 비스타로 여기서는 이탈리아 영화 ‘데카메론’을 봤다. 그러나 그 뒤로 영화 관객들의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면서 이런 극장들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비스타는 지금 메이저 영화 개봉관이다.
빙 극장의 영화 시리즈가 폐지되면서 할리웃 클래식과 외국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또 하나 사라졌다. 이제 그나마 아직도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할리웃의 이집션과 샌타모니카의 에어로 그리고 웨스트LA의 해머 뮤지엄 내 빌리 와일더 극장 등 세 군데가 남았다. 한편 기자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는 LACMA의 이번 조치에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내기로 했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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