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가장 일본적인 감독이라 불리는 야수지로 오주(1903~1963)의 전후 3대 명화로 꼽히는 ‘만춘’(Late Spring·1949)과 ‘맥추’(Early Summer·1951)와 ‘도쿄 이야기’(Tokyo Story·1953)를 다시 한 번 봤다.
오주 영화의 주제는 소시민 가족의 평범한 삶으로 특히 전통 일본 가족의 해체를 자주 묘사하고 있다. 그의 영화는 별 내용이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소묘인데도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데다가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어질고 자상해 그의 영화를 보면 미열과도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또 모든 것이 일어난다. 가족들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학교와 직장엘 가고 오후에는 귀가해 다시 밥 먹고 얘기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게 일이다. 그는 이런 평범한 것들을 통해 세대 차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실망 그리고 가족의 죽음과 부부 갈등 및 자녀의 결혼준비 같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거의 반 극적으로 천천히 들려준다.
특히 오주는 ‘만춘’(사진)에서처럼 종종 나이 먹은 홀아버지를 남겨놓고 시집을 갈 수 없어 혼기를 놓친 딸과 마침내 착한 딸을 시집보내면서 섭섭해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고요하면서도 가슴 사무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얘기뿐 아니라 영상 형태마저 지극히 검소하다. 얘기에서 분명한 플롯과 과다한 드라마를 포기했듯이 카메라는 앉은뱅이의 부동자세를 취한다.
다다미 위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놓은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다다미 위를 오락가락하는 맨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오주는 ‘적을수록 많다’는 것을 실현한 미니멀리스트였다.
‘맥추’ 역시 혼기를 놓친 딸(27세나 28세)을 시집보내려고 애쓰는 부모의 이야기로 오주는 여러 영화에서 뒤늦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분열하는 가족의 모습을 저물어가는 기운으로 화폭에 그리고 있다.
꼼짝 않는 카메라는 이런 서민가족의 삶과 함께 다다미방과 복도, 밥상과 혼자 놓인 화병, 통근열차와 조는 듯한 정원 그리고 빨랫줄에 널린 빨래와 연기 나는 굴뚝과 지붕 같은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멀리서 낮은 각도로 관조하듯이 포착하면서 화면에 은근한 감정적 파랑이 일어난다. 그것은 정일 속의 힘찬 감동으로 오주의 화면은 쓸쓸하게 아름답다.
오주의 영화들은 ‘조춘’과 ‘만추’처럼 계절을 제목으로 단 것이 많다. 제목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그는 여러 영화에서 같은 배우들(아버지 역의 치슈 류와 딸 역의 세추코 하라)과 같은 집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맥추’와 ‘도쿄 이야기’에서처럼 극중 인물의 이름과 일부 대사까지 같은 것을 쓰고 있다. 계절의 변화처럼 삶도 불가피하게 변하는 과정이 같은 가족을 통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는데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노라면 어느 새 나도 그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고 만다.
서민들의 일상의 품위를 고상하게 만들어준 오주의 영화가 좋은 것은 그가 인간들의 실수와 과오를 넉넉히 관용하면서 삶의 문제들을 체념에 가까운 자세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주는 기대와 현실의 불일치를 받아들일 줄 아는 현자로 우리가 아무리 삶 때문에 울고불고 안달을 해도 그것은 제 코스를 따라 간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주의 영화는 체념적인 기분 속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의 이런 유머감각은 ‘맥추’에서의 어린 장난꾸러기 막내아들의 세수(?) 장면에서 재미있게 묘사된다.
오주의 영화는 ‘도쿄 이야기’가 1972년 뒤늦게 뉴욕에서 상영되면서 국제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시골에서 도쿄로 아들과 딸과 손자들을 보러 왔던 노부부가 자신들을 짐스럽게 여기는 자식들에게 실망하고 귀향하는 얘기로 노부부를 친부모처럼 대접하는 유일한 사람은 그들의 미망인 며느리(세추코 하라)다. 이 영화는 죽음을 다루고 있어 오주의 다른 작품들보다 다소 어둡다.
오주는 철저한 홈드라마의 장인이었다. 그는 죽음의 침상에서도 자기를 찾아온 제작자에게 “삶이란 끝까지 홈드라마 같구려”라면서 멜로드라마 같은 삶을 웃어넘겼다. 오주의 인생관은 그가 영화 속 주인공들을 통해 피력한 “삶이란 실망스러운 것이야”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왜 오주를 좋아하는지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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