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 더구나 그의 첫 사랑의 대상이 연상의 여인일 경우 소년은 보다 빠르게 어른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사람’(The Reader)의 주인공인 15세난 고교생 미햐엘 베르크도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나 더 먹은 전차 차장 한나 슈미츠를 사랑하면서 소년티를 벗어난다. 그는 한나와 첫 섹스를 한 다음 날 밤 한나를 사랑하게 되고 거듭되는 육체적 열락을 통해 자신감이 생기고 공부도 더 잘 하고 또 자기 몸에 대해서도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가슴 아픈 첫 사랑에 대한 추억과 전후 독일인 2세들의 부모와 자신들에 대해 갖는 죄의식을 다룬 ‘책 읽어주는 사람’은 가슴이 저며 들도록 아름답고 슬프면서 또한 심오한 통찰력을 지닌 책이다. 회한이 안개처럼 작품 전체를 덮고 있는 가운데 첫 사랑의 희열과 살갗 냄새가 감관을 자극하는 에로틱한 육체적 만족 그리고 독일인들이 가져야 하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집단 죄의식을 정열적이며 준엄하게 다루었다. 법학 교수이자 판사이기도 한 슐링크는 일체의 장식 없이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힘 있게 도덕과 사랑과 성애와 연민의 얘기를 서술,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1950년대 말이 시간대인 제1부를 읽자니 나의 고교시절의 기억들이 밀물 쳐 들어온다. 청춘의 경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것인가 보다.
한나에게 ‘우리가 당신은 내 속으로 그리고 나는 당신 속으로 사라질 때 그 때 나는 나요 당신은 당신’이라는 유치하나 감정적으로 솔직한 연시를 써 보낸 미햐엘은 릴케를 사랑했다. 연애편지질 하던 내 옛날이 생각나는데 릴케는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한 시인이다.
한나와 함께 할리웃 영화를 좋아한 미햐엘이 영화 대사를 인용한 리처드 위드마크와 도로시 말론이 나온 웨스턴 ‘왈록’도 내가 좋아하는 웨스턴 중 하나다. 그리고 미햐엘은 자기와 한나와의 관계를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들인 쥘리앙 소렐과 레날 부인과의 그것에 비유했는데 난 고교시절 비도덕적인 쥘리앙을 동경했었다. 나이가 나와 동갑인 슐링크와 나의 과거의 경험들에서 공통점을 읽는 것 같아 책에 애착이 더 갔다.
책은 굉장히 에로틱한데 둘 다 발가벗은 채 미햐엘이 한나의 온 몸을 더듬으며 엉덩이와 젖가슴과 넓적다리의 감촉과 탄력을 말의 그것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는 대목은 아름답고도 진하게 감각적이다. 그리고 미햐엘은 한나의 신선한 냄새를 특히 좋아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 지난해 개봉된 동명영화<사진-DVD>에서도 한나 역의 케이트 윈슬렛(이 영화로 오스카 주연상) 과 미햐엘 역의 데이빗 크로스의 나체 섹스신이 대단히 뜨겁고 적나라하다.
한나는 미햐엘과의 정사 후 미햐엘을 ‘키드’라 부르며 책을 읽어 달라고 부탁한다. 미햐엘은 한나에게 ‘오디세이’와 ‘채털레이 부인의 사랑’과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는데 한참 뒤에야 한나가 문맹임을 알게 된다.
제1부 끝에 가 한나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미햐엘은 잠 속에서 한나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공부시간에도 한나만 꿈꾸고 또 한나가 살던 아파트를 피해 다니면서 고통한다. 그리고 미햐엘은 이 아픔을 통해 물먹은 수목처럼 부쩍 성장한다.
이어 법대생이 된 미햐엘이 견학차 간 법정에서 나치 전범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한나를 목격하면서 전후 독일인들의 죄의식 문제가 제기되고 한나는 종신형을 받는다. 과연 2세들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저지르고 또 묵과한 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식들은 자신들의 부모들이 범죄자들을 묵인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영원히 수치스러운 자들로 선고해도 되는가.
제3부는 중년의 변호사가 된 미햐엘과 옥중의 한나가 녹음테입을 통해 다시 책 읽어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로 되돌아가면서 둘의 한 맺힌 사랑이 이어진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할 것은 한나와 미햐엘이 모두 한나가 가벼운 형을 받을 수도 있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둘 다 모두 이것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을 지키려 하는 한나와 사랑하는 여자의 뜻을 지켜 주려는 미햐엘의 공범행위라고 하겠다. 여기서 사랑에 대한 책임문제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느냐 하는 문제가 미햐엘에 의해 거론된다.
글은 비극적 사건과 함께 영원히 한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미햐엘의 천벌과도 같은 고독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고독은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진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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