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히 바라다 보이는 인간과 사물도 믿기가 힘들진대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부활절을 맞아 생애 작품을 통해 고독과 도덕과 믿음 등 실존적 문제들에 대해 물음을 해왔던 인간 영혼의 탐구자 잉그마르 베리만의 ‘믿음’ 3부작을 다시 한 번 봤다. 믿음과 의심의 치열한 대결을 그린 세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영혼의 절규다.
살벌할 정도로 내용과 흑백 화면(스벤 니크비스트 촬영)이 엄격해 몸에 채찍질을 받는 전율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을 믿는다는 것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고 해도 되겠다.
베리만이 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어렸을 때 엄격하고 보수적인 루테란교 목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와 교회 안과 밖에서의 다른 아버지의 위선적 행동 때문이었다. 그는 8세 때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집안에 가득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베리만은 3부작(그러나 베리만은 처음부터 3부작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중 마지막 편인 ‘침묵’을 만든 40대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아버지 컴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는 종교적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따라서 ‘믿음’ 3부작은 베리만의 자기 정화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세 편은 모두 실내악처럼 나오는 인물이나 대화가 절제됐고 시간도 제일 긴 것이 하루 반이다. 그리고 배우들도 모두 베리만 영화의 단골 출연자들이다.
고린도 전서의 구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에서 제목을 따온 제1편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Through a Glass Darkly·1961)는 이 성경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이 확실히 보이지를 않아 몸부림치며 고통 하는 4인 가족의 얘기다. 흥미 있는 사실은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정신병을 앓는 카린만이 신과 ‘소통’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 편 모두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보통 사람들보다 신에게 더 가까이 접근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신의 존재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데 끝에 가서 카린의 아버지로 작가인 데이빗이 ‘신은 사랑’이라고 그 요구에 답한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지극히 애매하게 느껴진다.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세 편 중 가장 혹독하게 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그 존재의 증거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것이 ‘겨울 빛’(Winter Light·1962·사진)이다. 주인공인 중년의 홀아비 목사로 인간적 사랑의 불능자인 토마스는 믿음을 잃어가면서(육체적으로는 독감을 앓고 있다)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는 “주여 왜 날 버리셨나요”라고 외치면서 ”당신은 반드시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고 윽박지르다시피 한다. 여기서도 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꼽추인 교회지기다. 그만이 십자가에 매어 달린 예수의 고독과 고통을 이해한다.
영화에서 토마스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학교 선생으로 신을 확신 못하는 마르타는 예수처럼 묘사된다. 발진으로 손바닥에 흉한 상처가 난 마르타는 자기를 마다하는 토마스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나를 가져다가 쓰세요”라고 간청한다.
영화는 토마스가 “단 한 사람만 있어도 희망은 있다”면서 마르타와 교회지기와 오르간 연주자 셋을 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끝난다. 그런데 토마스의 잔뜩 경직된 얼굴을 보면서 그가 억지를 부리는 것이나 아닌가하는 의심이 간다.
베리만은 이같은 결론에 대해 “나는 ‘거울을 통해-’에서 찾았다고 생각한 신의 존재를 여기서 제거해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파파’라고 불렀는데 이 파파는 베리만의 실제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이 진행되는 시간은 정오에서 하오 3시까지로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통당한 시간에 맞춘 것.
마지막 편 ‘침묵’(Silence·1963)은 성격과 삶의 방식이 서로 판이한 두 자매와 둘 중 동생인 안나의 어린 아들이 나오는 현대사회 속 인간의 소외감과 의사 불통과 고독 그리고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 등을 다뤘다. 셋은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언니인 에스터가 중병에 걸려 낯선 도시의 호텔에 묵는다.
에스터는 심한 발작과 함께 기침을 하면서 “오, 하나님 나 혼자 여기서 못 죽어요”라며 울부짖으며 신의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신은 침묵을 지킨다. 에스터의 육체적 고통은 신을 찾는 영혼의 고통이라고 하겠는데 영화는 영적인 에스터와 육적인 안나를 대조하면서 영과 육의 갈등을 육감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들을 보면서 학생 때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으면서 겪었던 안타까운 협소감을 느꼈다. 그 것은 도저히 그들이 열어 놓은 영적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은 절망감과도 같은 것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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