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부터 8일까지 뉴욕엘 다녀왔다. 거리의 잔설이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춘색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번 뉴욕행은 F/X-TV의 스릴러식 변호사 드라마 ‘대미지’의 글렌 클로스와 오는 20일에 개봉되는 지구 종말 영화 ‘노잉’의 니콜라스 케이지 등 4편의 TV 시리즈와 영화를 위한 프레스 정킷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주목적은 그 동안 몇 차례 벼르던 뮤지컬 ‘남태평양’(South Pacific·사진)을 보는 것이었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을 원작으로 뮤지컬 ‘왕과 나’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와 작사자 오스카 해머스틴 II가 만든 ‘남태평양’은 2차 대전 때 남태평양의 섬에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사랑의 이야기다.
내가 특히 ‘남태평양’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름답고도 슬픈 두 쌍의 사랑의 내력과 주옥같은 노래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내가 고등학생 때 겪은 경험 때문이기도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 때는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갔는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오늘 방과 후 대한극장으로 ‘남태평양’(1958)을 보러 가니 돈들을 준비하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영화광이었던 나는 그 날 돈이 없어 구경을 포기했다. 속이 얼마나 아팠었는지 모른다.
그 얼마 후 나는 혼자서 대한극장 2층 맨 앞줄에 앉아 이 영화를 봤는데 70mm 화면에 펼쳐지는 남태평양의 수려한 풍경과 선남선녀의 사랑 그리고 줄줄이 나오는 즐겁고 감미로운 노래들에 넋을 잃고 말았었다. 나는 특히 주인공인 프랑스인 농장주 에밀(로사노 브라지-노래는 조르지오 토치)이 자기가 사랑하는 미여군 간호장교 넬리(미치 게이너가 직접 노래)에게 부르는 ‘섬 인챈티드 이브닝’의 황홀한 멜로디와 가사에 반해 그 후 가사를 외워 지금도 가끔 혼자서 노래를 부른다.
‘섬 인챈티드 이브닝/유 메이 시어 스트레인저/(반복)/어크로스 어 크라우디드 룸/앤 섬하우 유 노/유 노 이븐 덴/댓 섬웨어 유일 시 허 어겐 앤 어겐’으로 시작해 ‘원스 유 해브 화운드 허/네버 렛 허 고/(반복)’로 끝난다.
어린 두 남매를 둔 홀아비 에밀과 아칸소 리들락 태생의 넬리 외에 다른 한 쌍은 미해병 소위 케이블과 금단의 섬 발리 하이에 사는 통킹처녀 리아트. 둘의 소꿉장난과도 같은 사랑이 청순한데 이 사랑은 케이블의 전사로 비련으로 끝난다. 뮤지컬은 사랑 외에도 전쟁과 영웅심과 고독과 인종차별 등을 다루면서 웃음과 눈물과 미 해군공병들의 장난 등을 노래와 춤에 섞어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4명의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리아트의 어머니로 수축된 인두를 파는 블러디 메리와 만물박사 해군 빌리스. 이들은 때로 주인공들을 능가하는데 블러디 메리가 부르는 ‘발리 하이’와 ‘해피 토크’ 그리고 빌리스가 동료 공병들과 같이 부르는 ‘데어즈 나신 라이크 어 데임’이 유명하다.
7일 하오 2시에 시작되는 ‘남태평양’을 보기 위해 전 할리웃 외신기자협회장으로 나의 스폰서인 필 버크와 함께 링컨센터를 찾아갔다. 현재 보수중인 링컨센터는 메트 오페라와 뉴욕 필의 본부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1949년 이 화려하고 즐겁고 또 로맨틱한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서 초연된(에치오 핀자와 메리 마틴의 노래로 5년간 공연) 뒤 첫 리바이벌로 지난 해 토니상을 7개나 탔다.
마티네인데도 공연장인 비비안 보몬트 극장은 만원이었다. 서곡부터 시작해 에밀의 두 아이들이 부르는 ‘디트-므와’에 이어 ‘섬 인챈티드 이브닝’이 나오면서 나는 옛날로 돌아갔다. 노래들이 아름다워서인지 아니면 과거가 그리워서인지 까닭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넬리가 머리를 감으면서 에밀을 잊겠다고 부르는 ‘아임 고나 워시 댓 맨 라이트 아웃타 마이 헤어’가 나오자 옆에서 필이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시간이 아쉽다”면서 자꾸 안경을 벗었다 꼈다 한다. 기억에 생생한 노래들인 ‘어 칵아이드 압티미스트’ ‘블러디 메리’ ‘마이 걸 백 홈’ ‘어 원더풀 가이’ ‘영거 댄 스프링타임’ ‘하니 번’ 등이 끝날 때마다 청중과 함께 열렬히 박수를 쳤다.
가수들은 노래를 잘 부를 뿐만 아니라 연기도 잘 했다. 세트와 의상과 조명 그리고 안무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음악과 극을 훌륭히 조화시킨 연출이 돋보이는 명작이었다. 공연시간 3시간이 물 흐르듯 지나갔는데 마치 영화를 무대공연으로 보는 것처럼 생동감과 사실감이 가득했다.
필과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와 니콜라스 케이지를 만나기 위해 리츠 칼튼 호텔을 향해 브로드웨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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