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이 시작되기 전 날인 지난달 28일 LA 다운타운의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 필이 연주하는 봄기운과도 같은 멘델스존의 곡들을 들었다. 올해는 멘델스존이 태어난 지 200주년(1809년 2월3일)이 되는 해여서 이 날 콘서트는 그의 작품 3개로 마련됐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날 지휘자가 디즈니 홀 건너편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현재 공연 중인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골트’를 지휘하는 제임스 콘론이라는 점. 콘론은 두 건물 사이의 길을 건너다니며 지휘를 했는데 멘델스존 곡을 지휘한 다음 날 그를 유대인이라고 해서 미워한 바그너의 곡을 지휘했다는 일도 흥미 있는 일라고 하겠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형태의 구성이 확실하고 멜로디의 아름다움이 천상의 미녀를 보듯 눈부신데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오묘한 조화라고 하겠다) 명주실처럼 섬세하면서도 정열이 끓어오를 때에는 거의 충동적으로 강렬하다.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 그의 음악이 이 날 새라 장(사진)이 연주한 바이얼린 협주곡 E단조다.
베토벤과 브람스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모두 D장조)과 함께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멘델스존의 바이얼린 협주곡은 구성과 멜로디와 기교면에서 그 어느 다른 바이얼린 협주곡도 따라올 수 없는 완벽한 곡이다. 여성적이면서도 열혈한의 열정을 지녔는데 불덩어리인 새라에게는 맞춤곡과도 같은 음악이다.
이 곡은 새라가 가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멘델스존의 협주곡은 이미 모든 바이얼린의 대가들이 나름대로 완성을 했기 때문에 그 것을 연주하려면 자신의 특색을 각인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서 “느끼는 대로 연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등이 훤히 드러난 물고기 모양의 드레스를 입은 새라가 연주하는 모습은 싱싱한 물고기가 펄펄 튀는 것처럼 탄력이 있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맴을 돌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은 반복되는 음에 의한 음의 변형으로 이뤄진 카덴자와 음들이 허공을 헤치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코다를 연주할 때는 마치 칼싸움을 하는 여전사와도 같았다. 아찔한 기교와 힘과 정열이 혼연일치가 된 연주였다.
마치 속에서 열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긴 머리채를 날리면서 발길질을 하는가 하면 무대 위를 전후좌우로 돌아다니면서 뜨거우면서도 물 찬 제비처럼 유연하게 연주했다. LA타임스가 우아함이 모자라는 연주라고 평한 까닭도 새라의 이처럼 흥분되고 활화산 같은 연주와 곡 해석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협주곡의 제2악장의 첫 부분을 들을 때면 늘 자니 마티스가 노래한 ‘어떤 미소’의 첫 부분이 떠오르곤 한다.
바이얼린 협주곡에 앞서 멘델스존이 15세 때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이 이 날 LA 필 초연으로 연주됐고 마지막 곡으로는 멘델스존이 17세때 작곡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원작인 프로그램 음악 ‘한 여름 밤의 꿈’에서 가장 유명한 곡들인 ‘서곡’과 ‘스케르조’ 그리고 ‘결혼 행진곡’이 연주됐다. 이 날 연주를 들으면서 느낀 점은 디즈니 홀의 성장과 함께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LA를 떠나 런던으로 가는 에사-페카 살로넨이 키워 놓은 LA 필의 음이 풍족하게 성숙해져 잘 익은 과일의 맛을 감각케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멘델스존의 음악에는 깊이와 심오함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밝은 음악에 대해 통상적으로 갖게 되는 편견이요 착각이다. 그런데 멘델스존의 음악이 이렇게 폄하되게 된 까닭은 유대인을 증오한 바그너의 독설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료에 따르면 바그너는 1850년 멘델스존이 오래 활동하고 또 그가 38세로 사망한 라이프치히의 한 저널에 발표한 수필에서 “멘델스존의 음악이 지나치게 세련된 반면 가슴을 쥐어뜯는 통렬함을 갖지 못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멘델스존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위대한 음악을 작곡 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클래시컬 음악의 많은 뛰어난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생각할때 바그너의 비판은 음악적이라기보다 완전히 인종차별적인 것이다. 물론 멘델스존의 음악은 히틀러에 의해 금지곡 처분을 당했다. 그런데 멘델스존은 아버지를 따라 어릴때 기독교로 개종한 신심 깊은 루테란 교도였다.
음악은 인류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위대한 음악가인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증오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 그래서 히틀러가 숭상한 바그너의 음악은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연주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 또한 증오의 반복일 뿐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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