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음악은 미녀와 야수의 성질을 동시에 지녔다. 그의 음악은 도도하고 압도적이면서 아울러 섬세할 정도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이런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그의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ebelungen)의 제1부작 ‘라인골트’(Das Rheingold)의 전주곡이다. 침묵으로부터 시작해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고 이윽고 라인의 담대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이 전주곡을 들으면 수압의 무게와 아름다운 전율을 함께 느끼게 된다. 이 곡은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 ‘신세계’의 오프닝 크레딧 장면에서도 효과적으로 쓰여졌다.
지난 21일 ‘링 헤드’인 친구 C내외와 같이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LA 오페라가 공연한 ‘라인골트’를 관람했다. 바그너의 세계와 인간 운명의 불확실성에 대한 고찰인 ‘링’사이클은 내용과 음악과 가사와 공연시간이 모두 묵중해 나는 관람 며칠 전부터 오페라의 음을 익히기 위해 예습을 했다. 먼저 1992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라인골트’ DVD를 보고 이어 조지 솔티가 비엔나 필을 연주한 ‘라인골트’ CD를 들었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전설에 근거해 바그너가 대본을 쓴 ‘니벨룽의 반지’는 그 소유자에게 세계 패권을 쥐어주나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끄는 황금반지를 둘러싼 권력과 탐욕의 파괴성과 구원의 능력을 지닌 사랑에 관한 도덕극이자 우의요 동화다. 전설과 신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을 지녔는데 이 악극도 마찬가지다.
‘라인골트’에서 신들의 왕인 보탄과 지하에 사는 흉측한 난쟁이 알베릭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황금에 대한 탐욕은 요즘 미 경제를 골병들게 만든 월스트릿의 탐욕과 다를 게 없다. 또 황금반지는 세계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는 도구이자 아울러 세계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핵과도 같다. 저주 받은 반지를 놓고 신과 거인과 난쟁이와 인간이 서로 싸우는 모양이 핵을 선취한 핵국가들과 이를 뒤늦게 가지려는 북한과 이란 등 간의 알력과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그너는 훌륭한 선지자라고 하겠다.
LA 오페라의 ‘라인골트’는 무대와 의상 디자인과 연출을 독일의 극미술가인 아힘 프라이어가 맡았다. 그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링’사이클을 음악과 연극과 시각미술의 완벽한 종합예술로 만들려고 한 바그너의 뜻에 맞추어 디자인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의 디자인은 다분히 초현실적인 인형극이요 서커스와도 같았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인형들로 만든 인형가게에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비행기까지 나온다.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기기괴괴한 모양들이어서 음악과 대사를 충분히 즐기는데 방해가 됐다. 얼굴에다 천을 뒤집어쓴 채 노래하고 담배 태우는 알베릭과 각기 손이 4개와 6개씩인 보탄의 아내 프릭카와 땅의 여신 에르다 그리고 머리에 새장 같은 우리를 쓰고 노래하는 보탄 등이 시각적으로 경이감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세계 각국에서 출연한 가수들의 노래도 질량면에서 음악성이 크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오페라를 보면서 지난 2006년 10월 오렌지카운티에서 공연된 키로프 오페라의 ‘링’사이클이 생각났다. 이 공연에서 브륀힐데로 나온 올가 세르게예바의 막강한 음성과 같은 바그네리안 음성이 아쉬웠다.
오페라를 관람하다 보면 귀가 번쩍하고 열리는 음성을 듣게 되는데 이번 ‘라인골트’에서는 알베릭의 학대를 받는 형제 미메역의 그래엄 클라크(테너)와 황금 때문에 형제인 화프너에게 살해 되는 화졸트역의 모리스 로빈스(베이스)가 그 중 낫고 나머지는 다 도토리 키 재기 식.
알베릭역의 고든 호킨스(바리톤), 붉은 악마 복장을 한 꾀 많은 로게역의 아놀드 베주엔(테너) 그리고 각기 프릭카와 그의 여동생 프라이어역을 맡은 미셸 드영(메조 소프라노)과 엘리 덴(소프라노) 및 3명의 라인 처녀들의 노래가 다 고만고만했다.
LA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제임스 콘론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오페라를 지휘 했을 때처럼 오케스트라 석을 가린 채 지휘했다. 그래서인지 소리도 힘이 모자랐다. 오렌지카운티 공연에서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한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황금빛 추수 밭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소리가 떠올랐다. 한 마디로 말해 바그너 음악의 힘과 장려함이 아쉬웠던 노래와 연주였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이런 스타일로 공연될 ‘발퀴레’가 과연 어떨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링’사이클의 제2부작 ‘발퀴레’(Die Walkure)는 오는 4월에 그리고 제3부작 ‘지크프리트’(Siegfried)와 제4부작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은 각기 내년도 시즌에 공연된다. 그리고 사이클 전체는 오는 2010년 5~6월에 걸쳐 열리는 ‘링 페스티벌 LA’ 때 세 차례 공연된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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