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 때 읽은 소설들의 주인공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을 생각하면 격렬한 느낌을 겪게 하는 것이 가지다. 가지는 일본 작가 줌페이 고미카와가 전쟁의 만행을 고발한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의 남자 주인공이다. 이 소설은 갓 결혼한 한 젊은 이상주의자가 개인을 비인간화하는 전쟁의 와중에서 집요하게 인간의 조건을 찾다가 비극적 종말을 맞는 반전소설이요 개인의 성격탐구 소설이자 또 순애보이다.
내가 고등학생 때 한국에서 느닷없이 일본 소설들이 대량으로 번역 출판됐었다. ‘빙점’과 ‘가정교사’도 그때 읽었다. 어느 날 단골 소설대여점에 들렀다가 고른 것이 만주전쟁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조건’. 한자로 작가 이름이 오미천순평이라고 적힌 표지에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동명영화에서 가지로 나온 타추야 나카다이와 그의 아내 미치코로 나온 미치요 아라타마가 나란히 선 옆얼굴 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나는 전쟁과 사랑과 인도주의와 일본 군대의 잔인성 등을 큰 화폭에 큰 붓질하듯 질펀하게 써내려간 글에 정신없이 매달렸었다. 무엇보다 날 감동시킨 것은 어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인간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지였다. 그는 위대한 반전영웅이었다.
이 소설 번역과 비슷한 때에 나온 한운사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학병 아로운과 중학생 때 본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졸병 프루의 고집을 연상케 하는 가지의 신념은 거의 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나는 후에 군에 가서 말뚝하사의 구둣발에 정강이를 채이면서 추운 겨울에 동해의 겨울밤을 지킨다고 보초를 설 때 이들을 생각하며 참았었다.
책을 읽은 지 수십년 후 미국에 온지 얼마 안돼 총 상영시간 9시간 반짜리 3부작 영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을 볼 기회가 있었다. 사흘간에 걸쳐 미 감독노조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느낀 감동은 거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글에서 읽은 가지의 이상주의와 그에 대한 가혹한 핍박 그리고 잔인한 훈련과 전쟁의 공포 및 가지와 미치코의 순수하고 가슴 아픈 사랑을 영상으로 자기체험을 하면서 나는 그 충격에 몸서리를 쳤었다.
전후 일본 영화 황금기의 명장 마사키 코바야시가 1959~61년에 걸쳐 자신의 명콤비였던 나카다이를 기용해 만든 이 대형화면 흑백 영화는 전쟁의 비참함과 그것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는 인간성이 내지르는 절규다. 코바야시는 2차 대전 때 군인으로 제국 군대의 잔혹성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그는 6년간 군생활을 하면서 상관의 진급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전쟁에 대한 항거로 내내 졸병으로 지낸 평화주의자였다.
이 살벌하고 끔찍하면서도 인간적이요 아름다운 실존적 반전영화는 코바야시와 함께 생애 총 11편의 영화(‘하라키리’ ‘크와이단’)를 만든 타추야 나카다이(75)가 표현한 가지에 의해 확실히 닻을 내리고 있다. 표현력이 가득히 담겨 있는 튀어나올 것 같은 황소 눈(본인은 자신의 내적 감정의 통로라고 말했다)으로 잘 알려진 나카다이는 영화 내내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오면서 인간성의 십자가와도 같은 가지를 깊고 민감하고 또 뜨겁게 구현하고 있다.
총 3부작은 제1부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No Greater Love·205분)와 제2부 ‘영원으로 가는 길’(The Road to Eternity·181분) 및 제3부 ‘군인의 기도’(A Soldier’s Prayer·190분) 등으로 돼 있다.
광산회사 기술자로 평화주의자인 가지는 만주의 중국인 강제 노동수용소의 환경을 개선하기위해 아내 미치코와 함께 현지에 온다. 그러나 관료주의와 일본군 헌병대의 횡포로 가지의 계획은 무산되고 그는 자신의 인도주의에 대한 응징으로 군에 징집돼 대소전에 투입된다. 패잔병으로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 가지는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 상거지 꼴을 하고 미치코가 있는 남쪽을 향해 눈보라가 치는 동토를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다가(사진) 눈밭에 쓰러진다(이 장면과 이 영화보다 몇 년 뒤에 나온 ‘의사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라라를 찾아 눈밭을 걸어가는 장면이 서로 매우 닮았다).
고미카와의 ‘인간의 조건’은 이데올로기와 자유의지의 충돌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든 인간의 운명을 다뤘다는 점에서 공교롭게도 제목이 같은 중국 혁명 초기를 배경으로 한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과 동류의 실존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조건’은 전쟁의 때에 살고 있는 요즘의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가 2월6, 7, 8일(하오 7시30분) 이집션 극장(6712 할리웃 323-466-FILM)에서 상영된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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