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서울의 한국일보는 6개월간에 걸쳐 ‘명작의 무대: 세계 영화기행’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했었다. 추억의 명화들의 현장을 방문, 작품의 배경 이야기를 쓰는 기획물이었다.
나는 ‘선셋 대로’와 ‘워터프론트’ 및 ‘지상에서 영원으로’ 등 미국 영화들의 현장을 취재했고 당시 파리 특파원이었던 나의 선배 김승웅형은 ‘애수’와 ‘로마의 휴일’과 ‘카사블랑카’ 등 유럽을 무대로 한 영화들의 얘기를 썼었다.
김형은 ‘카사블랑카’(Casablanca-하얀 집이라는 뜻)에 관해 쓰면서 이렇게 넋두리를 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차피 한 편의 영화가 아닐까. 상영시간이 60~70년 정도 걸린다는 것, 또 누구든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이 다를 뿐, 인생만사는 구질구질한 한 편의 영화 스토리에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카사블랑카에 닿는다.
그리고 그는 도착한 날 밤 모하메드 5세 광장에 있는 호텔 하이야트의 옥내 바 ‘카페 아메리캥’을 찾아가(그러나 영화는 전부 LA 인근 북쪽의 버뱅크에 있는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무명 가수에게 영화에서 흑인가수 샘역의 둘리 윌슨이 부른 노래 ‘애즈 타임 고즈 바이’를 신청한다. “유 머스트 리멤버 디스/어 키스 이즈 저스트 어 키스/어 사이 이즈 저스트 어 사이/ 더 펀더멘탈 싱즈 어플라이/애즈 타임 고즈 바이”
샘이 느닷없이 카페 아메리캥을 찾아온 일사(잉그릿 버그만)의 간청에 못 이겨 ‘애즈 타임 고즈 바이’(As Time Goes by)를 부르다가 카페 주인 릭(험프리 보가트)에게 야단을 맞던 장면이 떠오른다. 센티멘탈하고 로맨틱한 이 노래는 내가 매주 일요일(상오 10시10분~11시) 한국일보의 자매 방송국 라디오서울(AM 1650)을 통해 방송하는 ‘일요 시네마’의 시그널 음악이기도 하다.
주제가처럼 감상적이요 로맨틱하고 또 아름답고 가슴 아픈 영화 ‘카사블랑카’는 명화가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골고루 지닌 작품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와 다양한 인물, 이국적 장소, 뛰어난 조연진, 유머 있고 냉소적인 대사 그리고 멜로 드라마적인 사건과 감상적인 상황 및 이상주의와 영웅적 행위와 사나이들 간의 우정과 의리 등.
그러나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센티멘탈리스트 터프 가이 보가트와 백합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버그만의 거역하기 힘든 화학작용 때문에 세상 모든 로맨틱스들의 영원한 사랑의 영화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세상에 사랑이야 하도 많지만 릭과 일사의 사랑이 가슴 깊이 사무치는 까닭은 둘이 영화 마지막에 가서 짙은 안개가 낀 카사블랑카 공항에서 헤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사진).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요원인 남편 라즐로(폴 헨리드)만 혼자 리스본으로 보내고 자기는 님의 곁에 남겠다고 사정하는 일사에게 릭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오늘 저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 당장은 후회하지 않을지 모르나 곧 영원히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릭을 바라보는 일사의 하얀 볼 위로 눈물이 구슬처럼 흐르고 그녀의 눈물을 응시하는 릭의 슬픔을 가둔 눈동자에서 쓰디 쓴 체념의 단호함이 어른거린다.
일사가 “우리는 어떻게 하구요”하고 다시 조르자 릭은 “우리에겐 언제나 파리가 있지 않아”라고 답한다. 그리고 릭은 일사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자, 당신을 이렇게 보니 좋기만 하네”라며 달랜다.
릭과 일사의 사랑이야말로 미완성의 아름다움인데 릭이 그날 일사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둘을 벌써 잊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별은 신탁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은 어차피 상하게 마련이라면 이별의 순수한 고통과 슬픔이야 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선물이라고 하겠다.
1942년에 개봉돼 빅히트를 하고 오스카 작품, 감독(마이클 커티즈) 및 각본상을 받은 ‘카사블랑카’는 희곡 ‘모두가 릭의 카페에 오네’가 원작. 영화 개봉 직후인 1943년 1월23일 루즈벨트 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이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가졌을 때 이 영화를 함께 봤다는 일화가 있다.
한 가지 재미난 에피소드는 처음에 릭과 일사 역으로 로널드 레이건과 앤 쉐리단이 각기 고려됐었다는 점. 이에 대해 김형은 이렇게 글을 맺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이 만약 릭 역을 맡았다면 영화 ‘카사블랑카’는 과연 오늘의 명화기행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레이건은 오늘의 미국 대통령의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것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WHV는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DVD 세트 ‘카사블랑카 얼티밋 컬렉터스 에디션’(Casablanca Ultimate Collector’s Edition)을 오는 12월2일 출시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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