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문 뉴욕은 가을비가 내렸다. 숙소가 센트럴팍 바로 건너편이어서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걸으니 프랭크 시나트라가 읊조리듯 부른 ‘뉴욕의 가을’이 떠올랐다.
‘뉴욕의 가을/ 그것은 새 사랑의 약속을 가져 오네/ 뉴욕의 가을은 종종 아픔과 섞이지/ 센트럴팍 벤치에 앉은 연인들은 어둠을 축복하네/ 뉴욕의 가을/ 그것을 다시 사는 것은 좋네.’ 마신 칵테일 탓인지 잿빛 연무 속의 마천루들이 어렴풋하다.
지난 12일부터 14일까지 오는 12월5일에 개봉하는 영화 ‘프로스트/닉슨’(Frost/ Nixon)의 주인공들과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엘 다녀왔다.
도착한 날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브로드웨이에 있는 월터 커 극장에서 체홉의 연극 ‘갈매기’를 봤다. 구경하기 전 하도 배가 고파 뉴욕의 명물인 거리의 핫독 스탠드에서 핫독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영화배우 크리스틴 스캇 토마스가 주연하는 ‘갈매기’는 자기 밖에 모르는 여배우와 주변 인물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얘기인데 기대했던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평일인데도 극장은 만원이었다.
뉴욕은 올해 두 가지를 크게 기념하고 있다. 그 첫째가 애칭 레니라 불린 고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 상임지휘자의 출생 90주년과 함께 상임지휘자 취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다. ‘번스타인: 모든 가능한 세계의 최고’라는 이름으로 지난 9월24일부터 오는 12월13일까지 진행되는 기념행사는 카네기홀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내가 레니의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고교생이었을 때 본 영화 ‘워터프론트’를 통해서였다. 그는 이 영화의 음악을 작곡했는데 난 지금까지도 메인타이틀 장면의 음악을 들었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기억한다. 폭력적이요 사납고 에너제틱한 그 음악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충격적이었다.
이 음악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 음악과 대중을 사랑한 레니는 음악에서의 엘리티즘과 포퓰리즘의 상호 교제를 시도했던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그 좋은 예다.
호텔서 지척지간인 카네기홀을 둘러봤다. 레니의 카리스마 있는 얼굴이 인쇄된 대형 포스터(사진) 앞에서 잠시 그를 추모했다. 14일은 그가 25세 때인 1943년 카네기홀에서 뉴욕 필의 지휘 데뷔를 한 날. 이날의 전체 프로가 ‘워터프론트 교향 조곡’등 레니의 작품들로 짜였는데 하루만 더 체류했더라도 듣고 왔을 텐데 아쉬웠다.
뉴욕이 두 번째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트루만 캐포티의 소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출간된지 올해로 50년째. 카네기홀에서 걸어 피프스 애비뉴에 있는 보석상 티파니를 찾아갔다. 나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로 안내원에게 “여기서 정말 아침을 먹을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노”라며 미소 지었다. 1층서 4층까지 보석을 파는데 2층 ‘인게이지먼트 링’ 홀에 올라가 어슬렁대며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니 팬시 셰이프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가 19만7,000달러.
티파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동명영화(1961) 때문에 온 세상이 알게 됐다. 돈 많은 남자의 위로에 의존하는 자유혼을 지닌 촌색시 할리 골라이틀리의 꿈과 사랑의 얘기인데 소매 없는 지방시 검은 드레스에 긴 물부리를 든 오드리 헵번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 있다. 이른 아침 동그란 눈으로 티파니의 상자 모양의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던 할리의 동경은 세상 모든 여자들의 부러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것이다.
티파니를 나와 플라자 호텔의 유서 깊은 오크 바엘 들렀다. 이 바는 히치콕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낮술 차 들렀던 케리 그랜트가 스파이들에게 납치된 곳이다. 그래서 난 그동안 뉴욕엘 들를 때마다 이 바를 찾았으나 호텔 개조공사로 매번 허탕을 쳤었다.
마침내 12일 오픈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완전 도떼기시장 같았는데 바텐더 니나가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 얘기를 묻는다고 알려줬다. 손님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비록 영화에서 봤지만 요즘 사람들이 케리 그랜트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우아함과 세련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칵테일 두 잔을 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텅 빈 바에서 피아니스트가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일찍 자기를 포기하고 칵테일과 함께 피아니스트에게 ‘세프템버 송’과 ‘마이 풀리시 하트’를 신청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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