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얼마 전 케이블 TV 라이프타임을 통해 방영된 ‘코코 샤넬’에서 샤넬로 나온 셜리 매클레인과의 인터뷰 때였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기억하는 폴 뉴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라고 물었다.
내 질문에 매클레인은 감회가 깊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1950년 당시의 자기 경험을 들려줬다. 그 때 매클레인은 전화로 초토화가 된 일본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을 필리핀의 수빅만에서 준비중이었다. 매클레인은 할리웃의 여러 배우들에게 쇼에 출연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에 응한 것은 뉴만 한 사람뿐이었다.
매클레인은 “뉴만은 찍던 영화도 미루고 즉시 날아왔다”면서 “그는 물질과 예술과 양심이 고루 배합된 사람이었다”고 답했다. 그리고 매클레인은 “난 결코 그 때의 일을 못 잊는다”면서 “우리들은 그를 정말로 그리워할 것”이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 26일 뉴만이 83세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첫 그림은 히죽이 웃는 그의 얼굴 모습이었다. 속으로 ‘웃기네’ 하면서 비웃는 듯한 이 미소는 망나니의 것인데도 그는 밉지가 않았다. 반 영웅적 매력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본 뉴만의 영화는 초등학생 때 본 ‘성배’(The Silver Chalice·1954)다. 그는 여기서 로마 시민에게 팔린 그리스 노예조각가로 스크린에 데뷔했는데 어린 내가 보기에도 타작이었다.
두번째로 본 영화가 서울 종로에 있던 서울극장에서 본 신나는 권투영화 ‘상처뿐인 영광’(Somebody Up There Likes Me·1956). 나는 이 영화를 본 날 고등학교에 붙어 그 상으로 어머니에게서 용돈을 받아 학칙을 어기고 극장엘 갔었다. 미국의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로키 그라지아노의 실화인데 뉴만의 건달 연기와 권투 액션이 어찌나 박력이 있었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즐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보고 가장 좋아하는 뉴만의 영화를 1편 고르라면 난 서슴없이 현대판 웨스턴 ‘허드’(Hud·1963·사진)를 고를 것이다.
우울하고 음침하며 쓴맛이 나도록 절망적인 이 작품은 저물어가는 서부에 바치는 만가로 사정없이 거칠고 강렬한 흑백 드라마다. 특히 영화는 인간성이 썩을 대로 썩은 텍사스의 목장주 아들 허드의 도덕적 타락을 집중 조명했는데 페어플레이와 인간 자존이 이렇게 가차 없이 능욕을 당한 영화도 없을 것이다.
예의와 체면을 존중하는 도덕적인 아버지 호머(멜빈 더글러스가 오스카 조연상 수상)와 달리 허드는 한 조각의 체면도 없는 짐승 같은 젊은이다. 그는 무감하고 조야하고 비도덕적이요 불경스러우며 또 탐욕적이요 불충실하고 무책임하며 성적으로 오만불손한 인간성과 인권의 유린자다. 한 마디로 말해 나쁜 놈이다.
그런데도 허드가 밉지 않고 그의 어린 동생 론(‘셰인’의 소년 브랜든 디 와일드)처럼 오히려 그를 영웅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오로지 뉴만의 연기 탓이다. 그의 오만방자한 연기는 경외스러운 것으로 타락과 비도덕의 숨겨진 매력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의기양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래리 맥머트리의 소설 ‘말탄 사람, 사라져 가다’가 원작인 영화에서 또 하나 멋있는 사람이 허드의 동물적 흡인력에 말려든 이 집의 가정부 알마(패트리셔 닐). 피곤한 모습이면서도 꾸미지 않은 성적 매력이 가득한 알마가 허드를 탐내며 바라보는 눈길은 체념적이어서 연민의 정을 일으키는데 닐은 이 역으로 오스카 주연상을 탔다.
영화에서 가장 치열한 장면은 술에 취한 허드가 알마를 겁탈하려고 달려드는 부분이다. 허드는 아버지와 대판 싸운 뒤 알마의 숙소를 박차고 들어가 그녀 위에 올라 탄채 알마의 옷을 사정없이 찢으면서 공격한다. 둘이 숨을 몰아쉬면서 격투하듯 마룻바닥에서 뒹구는 모습을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카메라가 거의 변태적이다.
호머는 심장마비로 죽고 알마와 론도 허드를 떠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허드에게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허드가 한 손을 내던지듯 제스처를 쓴 뒤 덧문을 닫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라스트신이 참으로 염세적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극장(중앙극장으로 기억한다)을 나오자마자 술 집으로 달려가 술을 퍼마시고 대취했었다. 허드가 목장 울타리 위에 걸터앉아 위스키를 병나발 부는 것을 보고 갈증을 심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