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에는 베토벤의 초상화가 담긴 작은 액자가 놓여 있다. 붉은 스카프로 목을 감은 흰 셔츠 위에 검은 재킷을 입은 산발한 그가 꽉 다문 입술과 응시하는 눈길로 한 손에 든 펜으로 노트에 악상을 옮기려고 하는 모습이다. 과연 이 초상이 실제 베토벤의 얼굴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때로 심신이 피곤할 때면 이 초상을 바라보면서 그의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에 대해 감사한다.
운명에 대어든 베토벤의 투지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이 우리에게 남다른 감동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고통과 절망의 수태기를 거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는 오랫동안 음부를 헤매다가 빛을 본 신생아의 울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연극 ‘내가 알았던 베토벤’(Beethoven, As I Knew Him)도 ‘환희의 송가’로 시작한다. 지난 달 25일 웨스트LA의 게펜 플레이하우스에서 본 이 연극은 내겐 또 하나의 색다른 예술적 경험이었다.
배우이자 피아니스트인 허쉬 펠더가 대본을 쓰고 주연에 피아노 연주(사진)까지 하는 이 1인극은 베토벤의 후반 삶과 음악에 관한 콘서트이자 강연이며 연극이다. 베토벤의 친구의 아들로 후에 의사가 된 게르하르트 폰 브러이닝이 12세 때 만난 베토벤에 관한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베토벤 삶의 종말기의 중요한 부분에 관한 목격담이어서 펠더의 정열적인 연기에 의해 묘사되는 베토벤의 이야기가 사실적 흥분감을 가져다준다.
이 연극은 펠더가 연기예술과 고전음악을 결합시켜 보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작곡가 소나타’(The Composer Sonata) 3부작 중의 하나다. 소나타의 3악장 식으로 꾸며진 시리즈의 다른 두 편은 ‘조지 거쉬인 홀로’(George Gershwin Alone)와 ‘무슈 쇼팽’(Monsieur Chopin)으로 자료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은 한국 의정부 연극제에서도 공연됐다.
‘내가 알았던 베토벤’의 장소는 비엔나. 연극은 브러이닝이 독일어로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기가 어렸을 때 만난 베토벤의 이야기를 독일어 액센트를 써가며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들려주면서 가끔 베토벤이 되어 투덜대듯이 중얼거리다가 또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한다. 펠더가 고집불통에 심술 맞고 대인관계를 꺼려하면서도 속은 착한 베토벤이 울다가 웃고 절망하다가 환희하는 모습을 힘차고 가슴 아프고 또 때로는 코믹하게 표현한다.
연극의 상당 시간이 펠더의 피아노 연주와 녹음된 베토벤의 음악으로 이어지는데 ‘비창’ 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 그리고 ‘월광곡’과 ‘운명’과 ‘합창 교향곡’ 등이 연주되고 효과음악으로 나온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에서 브러이닝은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피아노로 치면서 노래까지 부른다.
또 브러이닝이 ‘월광곡’을 칠 때는 무대 뒤 스크린에 베토벤이 이 곡을 바친 백작부인의 모습이 잉크에 찍은 펜 그림으로 투사되는데 이 스크린에 인물과 장소 등이 투사되면서 얘기의 배경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음악이 너무 많아 이야기 서술에 다소 방해가 되고 있었다.
두 말할 것 없이 가장 극적 긴장감을 주는 부분은 베토벤이 자신의 청각 상실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베토벤이 체념하듯이 “나는 귀가 먹었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에서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내가 몇 년 전 방문한 베토벤이 요양차 묵었던 비엔나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날은 비가 내렸는데 나는 베토벤이 머물면서 유서를 썼던 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베토벤이 산책했을 거리를 따라 빗속을 거닐었었다. 연극은 역시 ‘환희의 송가’로 끝이 났다.
베토벤의 삶의 마지막 부분을 충분히 담기엔 폭이나 깊이가 다소 모자랐지만 펠더의 연기와 연주는 박수를 받을 만했다. 그의 연기는 작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가득한 것이었는데 탐구적이면서 숙연해지도록 진지하고 또 때로는 우스워 즐거움이 컸다.
이 연극은 지난 5월 샌디에고의 올드 글로브 극장에서 세계 초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LA로 장소를 옮겼다. 펠더는 ‘작곡가 소나타’의 제1 악장으로 극적인 베토벤을, 제2 악장으로 로맨틱한 쇼팽, 그리고 제3악장으로는 화려한 댄스 같은 축하인 거쉬인을 썼다.
공연은 10월5일까지 계속된다. 주소: 10886 Le Conte Ave.
(310)208-5454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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