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사이몬 래틀과 클라우디오 아바도 및 쿠르트 마주어 등 여러 세계적 마에스트로들의 지휘하는 모습을 봤지만 아직까지 즐기지 못한 지휘자 중에 에도 드 바르트와 네빌 매리너 등 몇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옛날 서울서 기자시절 할 때부터 그에 관한 기사를 읽어 이름이 낯익은 홀랜드인 드 바르트의 지휘를 보고 싶었다.
지난 26일 드 바르트는 할리웃보울서 LA 필을 지휘해 독일 낭만파들의 음악을 들려줄 예정이었다. 마침내 그를 만날 기회에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내 컴퓨터에 LA 필로부터 드 바르트가 몸이 아파 출연을 못한다는 e-메일이 날아왔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드 바르트 대신 보울 무대에 데뷔하는 지휘자가 한국 여성 성시연(33)이었다. 무지의 소치로 난 성시연이라는 지휘자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력서를 보니 세계 굴지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의 부지휘자가 아닌가.
요즘 세상이 남녀평등의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클래시컬 음악계 특히 지휘자 중에 여자를 찾아 보기란 볏단 속에서 바늘 찾기만큼 힘들다. 미국의 큰 오케스트라 지휘자 중 여성이라고는 지난해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마린 알솝 단 한 명이라는 것이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볼티모어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처음에 알솝의 취임에 거부반응을 보였는데 지금은 서로 호흡이 잘 맞아 알솝 취임 후 이 악단의 연주기량 및 대중의 인기도가 크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성시연이 소위 미국의 빅5 중 하나인 BSO의 부지휘자라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크게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다. 성시연은 지난 2006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조지 솔티 국제 지휘경연대회서 1등을 한 것을 계기로 그 다음해 BSO의 상임지휘자인 제임스 리바인의 부름을 받아 이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됐다. 여성이 BSO의 부지휘자가 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시연은 올 여름 BSO의 여름무대인 탱글우드에 데뷔해 격찬을 받았는데 2008-09 시즌에 심포니 홀에서 BSO를 데뷔 지휘할 예정이다.
청삼 식의 칼러를 한 검은 옷을 입고 보무당당히 보울 무대를 걸어 단에 오른 성시연(사진)의 시원한 지휘 스타일은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부터 대뜸 나를 사로잡았다. 노래를 입술로 따라 부르면서 박력 있는 지휘를 했는데 남성적인 큰 제스처가 어미 닭의 포용력을 갖췄으면서도 아주 유연했다.
이 날 레퍼터리는 독일 낭만파 세 거인들인 바그너와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로 짜여졌다. 첫 번째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가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 서곡. 행진곡풍의 당당함과 서정미를 잘 엮어갔다.
갑자기 대타로 준비와 연습이 모자란 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날의 레퍼터리가 다루기 힘든 슈만과 브람스의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성시연의 지휘는 큰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두 번째 곡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연주자인 중국여인 신성 사첸(29)이 제1악장 처음 부분에서 다소 오케스트라와 호흡이 불일치한 것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성시연과 LA 필은 상응하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사첸은 1악장 후반부터 제 템포를 찾아 이 서정적이요 중후한 협주곡을 힘차고 정열적으로 연주했다.
성시연의 지휘는 슈만보다 마지막 곡인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을 연주할 때 뻗어가는 초목처럼 우람찬 생동감을 보였다. 눈앞에서 그녀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신 음들이 색깔을 갖추고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생생하고 감각적인 지휘였는데 성시연은 진지하면서도 감정적이요 또 표현력 뚜렷하게 어둡고도 로맨틱한 브람스의 곡을 잘 처리했다.
성시연은 단 위에서 마치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처럼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활기차면서도 아름답게 지휘했다. 머리칼을 펄펄 날리면서 눈과 입술로 음을 그리면서 오케스트라로부터 우수와 낭만이 가득 찬 브람스의 멜로디를 멋있게 이끌어냈다. 브람스가 끝나자 청중들이 박수갈채와 환호로 성시연의 보울 데뷔를 축하해 줬다. 놀랄 만한 지휘였다.
성시연은 부산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했고 13세 때 첫 솔로 콘서트를 가졌다.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뒤 지휘로 방향을 틀어 스웨덴과 베를린에서 연수했다. 공식 지휘 데뷔는 2002년 베를린에서 공연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이었다. 성시연과의 재회가 기다려진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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