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안 났더라면 과연 나는 지금 피아니스트가 되었을까. 나는 6.25 얼마 전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었는데 전쟁이 나는 바람에 피아노고 뭐고 우리 집은 망해버리고 말았다. 이 피아노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요즘도 피아노 음악을 들을 때면 가끔 ‘아 내가 그 때 피아노를 계속해 배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곤 한다.
이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명동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보여주는 미국 뉴스에 나온 밴 클라이번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것을 계기로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B플랫 단조)을 좋아하게 됐다. 텍산인 클라이번은 미소 간 냉전의 기운이 팽배하던 1958년 4월 23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피아노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그가 결선에서 친 곡이 바로 이 협주곡이었다.
뉴스 필름은 키 6피트4인치에 갈비씨로 학을 닮은 클라이번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과 함께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모스크바 시민들 그리고 그가 귀국해 마치 개선장군처럼 뉴욕에서 티커테이프 퍼레이드 환영을 받는 모습 등을 찍은 것이었다. 나는 그 때 클라이번이 얼마나 부러웠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은 지금까지 나의 센티멘탈 애청곡으로 남아 있다. 대학생 때는 축음기도 없는데도 가정교사를 해서 번 돈으로 청계천의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이 곡의 LP를 사다 놓고 표지의 클라이번의 모습을 감상했었다.
1990년대 초로 기억된다. 클라이번이 할리웃보울에서 연주한다는 것을 알고 당시로서는 거금인 1인당 50달러짜리 표를 사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보울엘 갔다. 그는 그 날 자기가 과거 경연대회 결선에서 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만 치고 힘이 들어 라흐마니노프는 포기, 대신 소품들을 연주했다.
나는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클라이번이 내려치는 차이코프스키를 들으면서 감격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따 라 라 라’ 하는 4개의 음으로 시작되는 이 협주곡은 ‘투나잇 위 러브’라는 팝으로 편곡돼 노래 불릴 정도로 서정적이요 정열적이며 또 우수가 깃들었는데 멜로디가 아주 화려하다.
지금 나는 클라이번의 모스크바 결선 연주 때 지휘를 했던 키릴 콘드라신이 미국에 와 카네기 홀에서 RCA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클라이번의 연주를 듣고 있는데 그의 연주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강렬한 호소력을 지녔다. 질풍노도와도 같다가 우아하고 섬세하고 민감한 연주인데 무엇보다 감정적이다. 나는 이 곡을 듣고 나면 늘 뼈아픈 연애 후의 거의 허탈감과도 같은 희열에 젖곤 한다.
지난 14일은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경연대회서 우승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군비경쟁에 박차를 가할 때로 소련이 6개월 전에 기습적으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프투니크 I호를 발사, 미국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청년 클라이번이 적지에 들어가 그 나라 작곡가의 곡을 연주,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했으니 미국인들이 열광할 만도 했다. 클라이번은 이로 인해 하룻밤 새 클래시컬 음악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수퍼스타가 돼 버렸다. 이런 압력과 그에 대한 끊임없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연주 요청이 그의 연주생애를 조기 종식시킨 계기로 작용했다.
국경과 적의마저 초월해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음악이다. 당시 클라이번에 대한 머스코바이트들의 애정은 거의 광적이었는데 특히 당시 수상으로 고전음악 애호가였던 흐루시초프(사진)는 클라이번이 제2차 경선 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쇼팽의 F단조 환상곡을 치는 것을 들은 뒤 클라이번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때가 때였던 만큼 클라이번의 결선 연주가 끝나자 거장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릭터 등 심사위원들은 비소련인에게 1등상을 주어도 좋은지 당국에 공식적으로 문의를 했다. 이때 흐루시초프가 개입해 “클라이번이 제일 잘 쳤어”라고 물은 뒤 “그럼 그에게 1등상을 줘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승리 몇 달 후 텍사스 포드워드의 일단의 음악교사와 주민들에 의해 밴 클라이번 피아노경연대회가 제정됐는데 매 4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를 통해 배출된 피아니스트들로는 라두 루푸, 올가 컨 및 크리스티안 자카리아스 등이 있다. 현재 73세로 오페라광인 클라이번은 포트워드에서 오페라와 콘서트 등을 즐기면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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