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간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의 무덤에는 오후의 봄볕이 따갑게 내려쬐고 있었다. 지난 5일은 할리웃 황금기 스크린을 군림한 데이비스가 태어난 지 1세기가 되는 날이었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큰 데이비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인데 난 그녀를 배우로서 라기 보다 거의 현세의 여인처럼 좋아한다.
지난 7일 하오 4시께 데이비스가 묻혀 있는 LA 인근 버뱅크의 포레스트론 할리웃힐스 묘지를 찾아갔다. 데이비스는 ‘기억의 뜰‘ 입구 왼쪽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석관(사진) 속에 누워 있다. 생일이 이틀이 지난 평일이어서인지 무덤을 찾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석관 위에는 먼저 찾아온 그녀의 팬들이 두고 간 장미꽃들이 놓여 있었다. 나도 데이비스 유족측이 마련해 놓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어 석관 위에 놓고 잠시 그녀를 추모했다.
관 앞에는 어느 팬이 남겨둔 데이비스의 두번째 오스카 수상작 ‘제저벨’(Jezebel·1938)의 비디오테입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 프랑스에서 찾아왔다는 도미니크라는 여자가 종이쪽지에 쓴 편지가 돌로 눌려 있었다. “당신이 돌아올 경우 나는 아직도 당신의 팬들이 많다는 것을 당신이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당신에게 말하려고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우리 여자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늘 필사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요”. 글을 읽은 뒤 나도 들고 간 노트쪽지에 “디어 베티, 당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자, 항해자여’ 속의 샬롯은 나의 영원한 연인입니다”라고 적어 도미니크의 편지 곁에 꽂아놓고 돌아섰다.
‘그녀는 필사의 노력을 다해 이루었노라’(She did it the hard way)는 데이비스의 묘비명으로 데이비스의 삶을 한 마디로 나타낸다. 성질이 불같고 오만할 정도로 콧대가 높았던 데이비스는 삶을 전투처럼 산 여자로 자신의 전성기인 1930~40년대 남자들의 세상인 할리웃의 체제에 끊임없이 도전해 ‘고약한 암캐’라는 악명까지 얻어 들었었다. 특히 그녀는 배역 문제로 자기 전속회사인 워너 브라더스의 잭 워너 사장을 고소, 당시 큰 화제가 됐었다.
내가 데이비스를 좋아하는 까닭 중 하나는 그녀가 웬만한 남자 알기를 신 흙털개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그 도도한 얼굴과 자세에 딱 맞는 성품으로 난공불락인 줄 알면서도 한번 도전해 볼만한 여자다. ‘제저벨’과 ‘편지’(The Letter)와 ‘작은 여우들’(The Little Foxes·1941)에서 데이비스와 함께 일한 명장 윌리엄 와일러는 데이비스의 애인이었는데 그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성질에 데어 ‘작은 여우들’을 끝으로 그녀와 결별했다. 데이비스는 와일러 외에도 하워드 휴즈등 애인도 많았고 불행한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
폭풍의 힘과 해일 같은 성격의 여자로 독설가였던 데이비스는 모든 사람과 일에 대해 오불관언적 태도를 취하며 살았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고독을 한탄하기도 했다. 영화계에서의 전성기 후 무대에서 활동했을 때 주위사람들에게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비록 총사령관적 태도를 유지했지만 데이비스는 뛰어난 재능과 억척같은 근면성을 지닌 배우였다. 데이비스는 1989년 81세로 사망했는데 유작은 죽기 2년 전 할리웃의 또 다른 고전적 여배우 릴리안 기시와 공연한 ‘8월의 고래들’. 그녀는 유방암으로 사망했는데 자기가 암에 걸린 것을 알자 “늙는다는 것은 약골들에겐 안 어울려”라고 말할 만큼 담대한 여자였다.
실제로 술과 담배를 즐겨한 데이비스는 영화에서도 멋지게 담배를 피웠다. 그녀가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보면 마치 자기를 연모하는 모든 남자들을 들여 마셨다가 뱉어내는 것 같아 위압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녀가 담배 피우는 자태가 전율할 정도로 로맨틱한 영화가 ‘자, 항해자여’(Now, Voyager·1942)이다.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애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서 뒤늦게 활짝 핀 여인으로서 유부남을 사랑하게 된 샬롯은 보다 고매한 것을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데 데이비스의 모습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감히 접근치 못할 품위를 지녔다. 이 영화 때문에 나는 데이비스를 좋아하게 됐는데 킴 칸스도 노래로 찬양한 ‘베티 데이비스 아이즈’를 나는 동경한다. 도톰한 눈두덩 아래 파인 우물처럼 습기에 찬 두 눈은 조금 너무 커 두렵기까지 하다.
데이비스 출생 1세기를 맞아 워너 홈비디오는 그녀가 나온 ‘기만’(Deception)과 ‘라인강의 감시’(Watch on the Rhine) 등 5편을 묶은 DVD 박스세트 ‘베티 데이비스 컬렉션 Vol. 3’을 출시했다. 또 아카데미는 5월 한달간 LA카운티 뮤지엄 빙극장(323-857-6010)에서 데이비스의 영화 16편을 상영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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