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내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는 그 해 생애업적상 수상자로 리처드 위드마크를 선정했었다. 나는 중학생 때 많은 웨스턴과 범죄영화에서 본 그를 실제로 만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시상만찬 파티에 기꺼이 참석하겠노라고 RSVP를 한 위드마크가 뒤늦게 몸이 불편해 자기가 살고 있는 코네티컷의 록스베리에서 LA까지 날아오지 못하겠다는 통보를 보내 왔다. 얼마나 섭섭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위드마크 대신 그의 친구이자 여러 편의 영화에서 공연한 코주부 칼 말덴이 시상식에 참석했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악역인 리처드 위드마크(Richard Widmark)가 지난 24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93세를 장수했다.
나뿐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은 위드마크 하면 대뜸 폭스사 작품인 범죄영화 ‘죽음의 키스’(Kiss of Death·1947)를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는 위드마크의 데뷔작인데 그는 여기서 중절모에 검은 셔츠와 검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범죄자 타미 유도(사진)로 나온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타미가 휠체어에 앉은 나이 먹은 여인을 전깃줄로 묶은 뒤 2층에서 계단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 이 때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타미가 마치 하이에나가 울듯이 “끼루룩 끼루룩” 하며 웃는데 등골이 서늘해재는 웃음소리다. 위드마크는 이 장면 하나로 평생 새디스틱한 사이코 킬러라는 이미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이 역으로 위드마크는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그 뒤로 위드마크는 ‘무명의 거리’와 ‘선술집’ 등 여러 편의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는데 맡은 역을 너무 잘해 길을 가다가 한 여인으로부터 뺨까지 얻어맞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위드마크는 악역에서 영웅 노릇까지를 모두 잘 한 뛰어난 배우였다. 도무지 그에게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도리스 데이와 공연한 코미디 ‘사랑의 터널’에서는 코믹한 연기도 잘 했다.
나는 어렸을 때 특히 그가 많이 나온 웨스턴을 통해 이 배우를 좋아하게 됐었다. 게리 쿠퍼와 공연한 ‘악의 화원’, 헨리 폰다와 공연한 ‘왈록’, 스펜서 트레이시와 공연한 ‘부러진 창’ 및 로버트 테일러와 공연한 ‘법과 제이크 웨이드’ 그리고 ‘마지막 포장마차’ 등이 기억난다. 위드마크는 존 웨인이 감독 주연한 ‘알라모’에서는 칼잡이 짐 보위로 나왔다.
위드마크는 전쟁영화(‘프로그멘’)와 드라마(‘뉴렘버그 재판’ ‘베드포드 사건’)와 역사극(‘긴 배’)등 다양한 작품에 나왔는데 시드니 포이티에와 공연한 ‘긴 배’에서는 바이킹으로 나왔다.
위드마크의 영화 중 뛰어난 영화를 들라면 ‘노 웨이 아웃’과 ‘거리의 공포’ 그리고 ‘밤과 도시’ 및 ‘사우스 스트릿의 소매치기’ 등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포이티에의 데뷔작인 ‘노 웨이 아웃’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로 ‘거리의 공포’에서는 전염병균 보균자를 추적하는 보건담당 관리로 나왔다. ‘밤과 도시’에서는 서푼짜리 레슬링 프로모터로 그리고 ‘사우스 스트릿의 소매치기’에서는 우연히 공산국가 스파이의 마이크로필름을 소매치기 했다가 위험에 휘말려 든다.
나는 하워드 휴즈의 애인이었던 진 피터스와 공연한 ‘사우스 스트릿의 소매치기’를 좋아하는데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위드마크는 악역이나 어두운 인물로 나와도 밉지가 않다. 영화를 보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배우다.
그는 1990년대 초까지 작품 활동을 했지만 마지막 히트작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것은 뉴욕 형사로 나오는 ‘매디간’이다. 폰다와 공연한 이 영화는 후에 TV 시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위드마크는 고교 때부터 드라마에 나왔고 모교인 일리노이의 레익포레스트 대학에서는 연극 지도까지 했다. 뉴욕으로 옮긴 뒤 라디오와 브로드웨이를 거쳐 할리웃으로 진출했다. 그는 영화에서는 비록 많은 악역을 했지만 실제로는 총과 폭력을 혐오하는 신사였다고 한다.
사망 소식을 들은 말덴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그렇게 좋은 친구는 있을 수가 없다”며 안타까워했고 포이티에는 “그는 훌륭한 예술가요 인간이었다”고 위드마크를 기억했다. 페어웰 딕!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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