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아카데미상은 지역주의에 매달리는 미국인들끼리의 잔치라는 비판을 종종 받아 왔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지난 24일에 열린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에 오스카 남녀 주·조연상을 받은 배우들(사진)은 모두 유럽인들인데 아마 영화를 많이 안 보는 사람들은 시상식 중계를 TV로 보면서 “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지”하고 고개를 갸우뚱 했을지도 모른다.
각기 ‘피가 있을 것이다’(현재 상영중)와 ‘장밋빛 인생’(DVD)으로 남녀 주연상을 받은 대니얼 데이-루이스(1989년 ‘나의 왼발’로 첫번째 주연상 수상)와 마리옹 코티야르는 아일랜드와 프랑스 배우들이다. 또 각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이클 클레이턴’으로 남녀 조연상을 탄 하비에르 바르뎀과 틸다 스윈튼은 스페인과 스코틀랜드 배우들.
그리고 소품 ‘원스’에서 자신들이 직접 출연해 노래한 ‘폴링 슬로울리’로 주제가상을 받은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는 각기 아일랜드와 체코 음악인들이고 ‘속죄’로 음악상을 받은 다리오 마리아넬리는 이탈리아인이다. 이밖에도 분장, 의상, 미술감독 및 단편 만화상 수상자들도 모두 비미국인들.
남녀 주·조연상을 비미국인들이 휩쓸어간 것은 1964년 역시 모두 유럽인들인 렉스 해리슨과 줄리 앤드루스 그리고 피터 유스티노프와 라일라 케드로바가 각기 상을 받은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 시드 게이니스 아카데미 회장은 “이는 우리가 국제적 기구요 전 세계에서 온 영화들 중 최고를 선택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스윈튼은 시상식후 “스페인과 프랑스와 영국인들인 우리는 모두 애초 할리웃이 유럽인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일을 했다”고 기뻐했다.
이번 시상식은 스윈튼이 조연상을 탄 것을 빼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는 결과를 보여줬다. 거의 모든 부문에서 예상했던 작품과 사람들이 상을 받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작품, 감독, 각색상 등 3관왕이 된 조엘과 이산 코언 형제의 경사 역시 예상대로였지만 대단한 업적이다. 과거 한 해에 이 세 가지 상을 탄 사람들로는 빌리 와일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제임스 L. 브룩스 및 피터 잭슨뿐이다. 그런데 코언 형제는 지난 1996년 다크 코미디 범죄영화 ‘화고’로 각본상을 받은 바 있다.
작품상 등 총 4개 부문 수상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현재 상영중)는 텍사스 광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탐욕과 배신과 복수에 관한 매우 폭력적이요 어두운 범죄 스릴러다. 일종의 현대판 웨스턴인데 이 영화 외에도 각기 남자 주연과 여자 조연상을 받은 ‘피가 있을 것이다’(There Will Be Blood)와 ‘마이클 클레이턴’(Michael Clayton·DVD)도 폭력적이요 어두운 영화들이다.
또 비고 모텐슨과 루비 디가 각기 남자 주연상과 여자 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동쪽의 약속’과 ‘아메리칸 갱스터’도 유혈폭력이 자심한 영화들.
아카데미는 폭력적인 영화에 좀처럼 작품상을 주지 않는데(또 하나 작품상 받기 힘든 장르가 코미디다) 이런 성향이 최근 몇 년 전부터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06년에 LA를 무대로 한 인종문제와 범죄와 폭력을 다룬 ‘크래시’가 뜻밖에 작품상을 받은 것이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첫 작품이었다. 이어 지난해에는 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의 보스턴 갱 세계의 내막을 파헤친 엄청나게 폭력적인 ‘디파티드’가 역시 작품상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올해 잇달아 세 번째로 폭력적인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놓고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의 후유증이 이제 본격적으로 할리웃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할리웃은 늘 다소 시간차는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와 ‘더티 더즌’과 ‘냉혈’ 및 ‘차가운 손의 루크’ 등 폭력적인 영화들이 나왔다. 또 미국인들이 워터게이트 후유증에 시달리던 1970년대 초에는 과대망상적 정치 스릴러들인 ‘콘도르의 3일’과 ‘대화’와 ‘시차 조망’ 등이 만들어진 것이 이런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이번에도 테러와 전쟁으로 미국인들이 알게 모르게 폭력의 기운에 젖으면서 영혼이 피폐해가고 있는 현상이 스크린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맹물 같은 사회를 본 이번 시상식은 오스카 사상 최저의 TV 시청률을 기록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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