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반세기여 전 내가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너무나 기뻤던 일 중의 하나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일본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LA 시내 여러 곳에 외국어 영화 전용관들이 있어 클래식 외화들을 연중 상영했었다. 특히 나는 LA 남쪽 크렌셔 지역에 있던 일본 영화 전용관 고쿠사이 극장의 단골이었는데 여기서 찐빵처럼 생긴 카추 신타로가 주연한 눈 먼 안마사 검객 자토이치 시리즈를 즐겁게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키라 쿠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는 지금은 개봉관이 된 비스타극장에서 봤다.
내가 지난 13일 92세로 사망한 일본의 명장 곤 이치가와(사진)의 걸작 기록영화 ‘도쿄 올림피아드’(Tokyo Olympiad·1965)를 본 것은 코리아타운 인근의 맥아더팍 초입에 있던 배가본드 극장에서였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서 봤는데 아름다운 영상미와 뛰어난 화면구도와 함께 기록영화 같지 않은 드라마 서술에 감탄을 했었다.
인본주의자였던 이치가와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일본을 내세우거나 승자의 기쁨에 치중하기보다 3등을 한 선수와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림픽의 인간화라고 하겠는데 나치 독일을 찬양한 레니 리펜슈탈의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드’(1938)와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만화영화부터 시작해 월트 디즈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이치가와는 일본 전후의 사회문제 노출을 두려워 않는 사회 의식이 강한 감독이었다. 쿠로사와와 비견할 만한 전후 일본 영화계의 훌륭한 감독이었다.
그는 예술영화뿐 아니라 사무라이 영화, 멜로드라마, 풍자 코미디, 기록영화 및 미스터리 등 전 장르의 감독이었다. 다작이어서 생애 총 86편을 연출했다.
이런 그가 진지한 감독으로서 국내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영화가 서사 반전극 ‘버마의 하프’(The Burmese Harp·1956)다. 이 영화와 또 다른 반전영화 ‘들 불‘(Fires on the Plain·1957)은 그의 대표적인 2편의 반전영화로 둘 다 아내인 나토 와다가 각본을 썼다. 이 두 영화는 이치가와의 또 다른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전쟁의 비참함을 보여주면서 다치기 쉽고 지키기 어려운 평화를 숙연하게 찬양하고 있다.
‘버마의 하프’는 2차 대전 말기 버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젊은 일본군인 미주시마가 종전 후 귀국을 거부하고 중이 돼 곳곳에 널려 있는 전우들의 시체를 맨손으로 묻어주면서 겪는 영적 변신을 그린 숭고한 작품이다. 그는 이같은 행동을 통해 전쟁행위에 대해 속죄하고 있는데 전사자들을 위한 비가이자 진혼곡인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희망적이요 신비감에 가득 차 있다. 보고 나서도 가슴에 짙은 잔영을 남기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작품이다.
‘들 불’은 필리핀 전투에 투입된 패잔 일본 군인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을 그린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다. 전쟁의 광기와 비인간성을 단죄한 명작인데 살기 위해 인육마저 먹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구토가 인다. 대사가 거의 없는 묵시록적인 반전영화다. 이 두 영화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이 꼭 한번쯤은 봐야 할 영화들이다.
비평가들은 상업적인 영화로 ‘키모노 쇼’라고 무시했지만 나는 찬탄하면서 본 영화가 영상미가 곱기도 한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1983)이다. 지금도 키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마키오카네 장성한 네 딸이 만개한 벚꽃 구경을 하는 총천연색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일본의 유명 작가 주니치로 다니자키의 소설이 원작으로 화사하게 아름답고 심오하면서 또 조락의 비감을 함께 섞어 가족을 한데 묶는 가족애를 강조한 작품이다. 1938년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오사카에 사는 몰락해 가는 부잣집 마키오카의 네 딸의 눈을 통해 본 일본의 사회와 정치적 변화상이다.
구세대의 잔해와도 같은 마키오카 가문의 네 자매가 다가오는 정치와 문화와 사회의 대변혁 앞에서 어떻게 과거의 부와 결혼과 생활태도의 전통 등에 대처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사려 깊고 민감하게 다루고 있다. 이치가와는 색깔을 자연을 창조하는 신의 조화처럼 찬란하게 쓰고 있다. 봄의 분홍일색인 벚꽃과 붉고 노란 가을단풍 그리고 겨울 천지 사방에 가득 찬 흰 눈들이 마치 살아 있는 풍경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이다.
키모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치가와는 골초였는데 결국 폐 이상으로 사망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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