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해머 뮤지지엄 내 빌리 와일더 극장(윌셔+웨스트우드)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영화: 그때와 지금’에 출품된 옛날 영화 3편을 봤다. 이 시리즈는 한국영진위 미주사무소의 협찬을 받아 UCLA 영화·TV 아카이브가 마련했다.
만사를 제치고 와일더 극장을 찾은 이유는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와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을 보기 위해서였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대학생 때 봤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었고 ‘지옥화’는 이번에 처음 봤다.
한국 전후 기지촌(영화에서 보면 뚝섬이 나오는데 당시 그 주변에 정말 기지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주변의 양공주들과 그들의 범법자 남자들을 둘러싼 애증과 욕정과 폭력과 배신 그리고 형제간 갈등과 죽음을 그린 뛰어난 작품이다. 필름 느와르이자 멜로드라마요 또 네오 리얼리즘 분위기마저 띠었는데 50년대 영화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작품이다.
기지촌 주변에서 살면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미군부대 군수물자를 터는 터프 가이 영식(김학)과 그의 여인으로 팔등신 미녀인 소냐(최은희) 그리고 형을 찾아 시골서 상경한 영식의 동생 동식간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양공주들과 범법자들의 일상과 마지막 한탕을 사실적이요 박력 있게 그렸다.
특히 대담한 것은 과감히 노출되는 여자들의 육체와 매우 선정적인 섹스신 등. 이와 함께 영식 일당이 달리는 열차에서 미 군수물자를 통째로 빼돌려 트럭에 싣고 도주하는 뒤를 지프를 타고 쫓는 헌병들과 영식 일당간의 총격전을 속도감과 박력감을 갖춰 찍은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리고 형제애는 소냐가 동식을 사랑해 그를 차지하기 위해 영식을 배신하면서 신파극의 절정을 이룬다. 안개 낀 갯벌에서 영식이 도망가는 소냐를 쫓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마지막 장면(사진)은 치정살인의 오페라적 표현이다.
약간 전후 일본 갱영화를 모방한 감도 있지만 신 감독의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과 뛰어난 재질을 과시한 재미있는 작품이다. 나는 영화 무대인 여름 뚝섬을 초등학생 때 자주 찾았던 경험이 있고 양공주와 GI 문화도 잘 알아 영화가 더욱 강한 감동을 주었다.
6.25의 참극을 겪은 이산가족의 하나인 나는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이와 함께 상영된 신성일 주연의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를 보면서 가슴이 무척 아팠다. 특히 피난길에 가족과 헤어져 외톨이가 된 채 부산까지 내려와 구두닦이를 하는 소년 돌(김정훈)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과 무의미를 고발한 반전영화 ‘들국화는-’는 역시 부산서 피난살이를 한 나의 경험과도 같아 눈물이 났다.
이만희는 사실주의 휴머니스트다. 그는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적도 인간적으로 묘사 ‘7인의 여포로’에서 북한군을 찬양(?)했다는 죄로 반공법에 걸려 재판까지 받았었다.
첫 장면이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 ‘돌아오지-’이 훌륭한 전쟁영화로 성공한 까닭도 그가 단순히 이 영화를 액션영화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액션과 함께 해병들의 개인적 성격 묘사와 전쟁의 비극성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고루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는 해병 1개 분대원들의 사투와 그들의 개인 얘기 그리고 전우애 등을 박력 있고 감동적으로 그린 이 영화는 절대적 운명과 맞서야 하는 군인들의 생각과 모습을 다소 신파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감동의 전파성이 더 강하다.
장동휘, 최무룡, 이대엽 및 구봉서 등이 나오는데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한 인해전술 공격과 육박전은 압도적인 액션신이다. 이런 액션 속에 구봉서가 보여주는 코믹한 연기와 대사가 전쟁의 긴박한 분위기를 녹여주는데 영화는 전투와 함께 해병들의 영내 생활과 술집 외출 장면 등을 고루 섞어 긴장과 이완의 조화를 이룬다.
이 영화도 ‘들국화는-’처럼 분대원들이 키우는 고아 소녀 영희(전영선)를 등장시켜 전쟁의 뼈아픈 슬픔과 허무를 통렬히 고발하고 있다. 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전선의 해병들의 헤어스타일이 하나 같이 갓 이발소에서 나온 것처럼 단정한 것이지만 이와 함께 다른 기술적인 결함 등은 당시 우리나라 영화계 조건을 생각한다면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함께 본 LA 영화비평가협회 동료 회원 마이론 마이셀이 “지금까지 내가 본 한국 영화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찬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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