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전장서 총알을 맞은 병사처럼 비틀거리며 사라져가니 나의 늙음의 주름살도 한 겹 더 두꺼워지고 있다. 늙음은 육적 아름다움의 고갈이다.
제인 폰다는 인터뷰에서 “성형수술은 왜 하는가.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했지만 늙음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져 6순에 환갑잔치를 치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잔치를 벌이지 않는다고 해서 먹은 나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어느덧 삶의 황혼기에 발을 담그게 된 나는 종종 늙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신문에 난 부음기사를 읽을 때면 죽은 사람의 나이와 내 나이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사람은 지금의 나보다 일찍 죽었고 또 이 사람은 나의 어머니처럼 86세에 죽었으니 내가 이 사람과 명이 같다면 앞으로 얼마는 더 살겠구나하면서 혼자 생명점을 치곤한다.
아무리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만 아름다움의 잔해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뉴욕에서 왕년의 아메리칸 골든 보이 로버트 레드포드를 만났을 때 느낀 쓸쓸한 감정은 아름다움의 무상함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레타 가르보가 늙어 추해 보이기 전에 은퇴하고 은둔생활을 한 까닭이 이해가 간다.
늙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그건 오는 세월을 손으로 막으려는 것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늙음을 조금이나마 늦게 받아들이려고 애들을 쓴다. 노인보고 노인이라고 부른다고 역정을 내는 것은 순전히 떼다. ‘시니어 시티즌’이요 ‘실버층’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노인이 청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난 어렸을 때 노인이 되면 마음과 감정도 늙는 줄 알았었다. 이제는 알게 됐지만 그때는 노인이 되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봐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줄 알았었다. 사랑과 섹스는 젊은이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고정관념도 바로 나의 이런 착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로맨스 그레이’라는 말도 있지만 노인들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사랑하고 섹스도 한다는 사실은 여러 조사에 의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노인들 중 80% 이상이 상대방과 섹스를 즐긴다고 나타났다. 특히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성적으로 더 공격적이어서 나이를 먹어서도 젊은 여자를 찾아다니며 ‘메이-디셈버 로맨스’를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은 이별로 끝나지만 ‘메이-디셈버 로맨스’는 늙은 한 쪽이 젊은 상대방으로부터 자기에게서 빠져나간 젊음의 아름다움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70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뜨겁게 사랑하고 섹스도 즐기는 영화로 충격적으로 진실하고 감정적인 작품이 한국의 박진표가 감독한 ‘죽어도 좋아’(사진)다.
둘 다 아내와 남편을 잃은 박치규 할아버지와 이순례 할머니(두 사람은 배우가 아닌 실제 동거인이다)가 서로 첫눈에 반해 아이들처럼 사랑하고 젊은이들 못지않게 성애를 즐기는 모습이 절실하다. 특히 이 영화는 장시간 계속되는 두 사람의 극사실적인 섹스신이 파격적이다. 처음에는 주름진 얼굴에 살이 늘어진 두 노인이 발가벗고 섹스를 하는 모습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다가도 그들의 순수하고 본능적인 육적 쾌감에 삶의 환희감마저 느끼게 된다.
곱게 늙는다는 말은 육체적이라기보다는 마음이 곱게 늙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더 좋을 것 같다. 마음이 고와야 모습도 곱다는 사실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도 잘 묘사돼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친구 C가 들려준 한 노인의 얘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친구가 옛날에 한국에서 길을 가다가 한 관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긴 수염이 하얗게 난 할아버지가 관 위에 누워 단잠을 자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저 노인이야말로 신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들려줬다.
이제 인생의 저녁 무렵을 걸으면서 마음의 아름다움이나마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느덧/늙은이의 나이가 되어/사랑스러운 것이 그냥/사랑스럽게 보이고/우스운 것이 거침없이/우습게 보이네./젊었던 나이의 나여./사고무친한 늙은 나를/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마종기의 시 ‘상처’ 중.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