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름다운 악몽과도 같은 혼란스럽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지닌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 본 히치콕의 심리분석 스릴러 ‘스펠바운드’(Spellbound·1945)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살인자로 의심을 받는 기억상실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존(그레고리 펙)을 사랑해 그를 심리분석으로 치료해 누명을 벗겨주려는 아름다우나 얼음처럼 차가운 여의사 콘스탄스(잉그릿 버그만)의 러브 스토리이자 살인자를 쫓는 스릴러다.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한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 존의 꿈 장면. 달리가 디자인한 이 장면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거대한 가위가 커튼 위에 그려진 눈을 자르는 장면이다. 난 그때 이 꿈의 장면을 보면서 불가사의한 매력과 함께 두려운 수수께끼를 풀기라도 하듯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생전 처음 영화와 미술의 신비로운 종합체험을 한 것이다.
내가 다시 달리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괴이하고 과격하며 또 모든 금기를 비웃는 듯한 창의성을 경험한 것은 지난 1980년 서울서 이곳 미주 본사로 파견 온지 얼마 안 돼서다. 꼬마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 온 나는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긴 했지만 그것에 관한 학문적 기초지식은 없었다. 그래서 당시 회사 근처에 있던 LA 커뮤니티 칼리지에 등록, 직장일 후 영화사를 배웠다.
개강 초 교수가 보여준 영화가 달리와 그의 동향인인 초현실주의 감독 루이스 부누엘이 함께 만든 ‘안달루시아의 개’(Chien Andalou·1929·사진). 검은 띠 같은 구름이 달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순간 발코니에 앉아 있는 여자의 등 뒤로 남자가 다가와 다짜고짜 이발용 면도로 여자의 눈동자를 이등분하는 첫 장면을 보고 몸서리쳤던 순전한 공포감은 아마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이장면은 ‘스펠바운드’의 꿈 장면에서 원용되고 있다.
이 장면을 유혹의 근원인 눈과 식인적 희생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와 함께 달리와 부누엘이 다시 함께 만든 ‘황금시대’(L’Age d’Or·1930)는 기존 미학과 도덕과 성직(특히 가톨릭) 등을 가차 없이 파괴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은 달리는 몰라도 그의 그림은 알 정도로 달리의 그림은 환상적이요 저 세상적일 만큼 독특하다.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에 잘 어울릴 것 같다. 대형 시계들이 밀가루 반죽한 것처럼 늘어져 있는 ‘기억의 끈질김’은 웬만한 사람들이면 한번쯤 봤을 그림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난해한 것 같은데도 친근감이 간다. 달리의 그림들이 추상적이면서도 팝아트적 성질을 갖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해라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 대한 도전이어서 달리의 그림을 보면 지적·감정적 탐구욕이 일어난다. 이런 욕심은 모든 다른 예술과 문학과 철학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달리: 그림과 영화’(Dali: Painting & Film) 전시회가 오는 14일부터 2008년 1월6일까지 LA카운티 뮤지엄(5905 윌셔 323-857-6000)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의 다른 그림들도 선보이지만 특히 영화 제작자요 각본가요 미술감독이기도 했던 달리의 그림과 영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100여점이 선보이는데 부수행사로 영화 상영 및 강연 등이 있다.
지난 10일 언론을 위한 전시회에 들렀다. 정문을 들어서면 ‘안달루시아의 개’의 면도에 의한 눈동자 양분장면 대형 사진이 눈길을 끈다. 전시실에서는 이 영화와 ‘황금시대’ 그리고 ‘스펠바운드’의 꿈 장면이 스크린에 영사되고 이들과 관련된 각종 스케치 등을 볼 수 있다. 또 달리의 생전 실제 모습을 찍은 비디오와 필름등도 있다.
보는 사람의 심근을 건드릴 만큼 생명감 있는 ‘피 흘리는 장미’가 내 눈길을 끌었다. 금발에 노출된 젖가슴이 도발적인 여인의 발가벗은 복부에 놓인 해부한 심장과도 같은 커다란 4송이의 붉은 장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참다못해 하류되는 욕망의 색깔이다. 그리고 ‘나르시스의 변신’과 ‘가을의 식인’등도 흥미있는 작품이다.
달리는 1940~48년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할리웃을 위해 일했다. 그 때 그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온 ‘리처드 III’를 위한 선전용 그림을 그렸는데 올리비에의 전면과 측면 두 얼굴을 접합한 모습이 이 병적으로 고약한 왕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 같다. 또 워너 브라더스의 사장이었던 잭 워너의 초상화도 있다.
달리의 동료 화가들은 그의 상업성을 비판했지만 영화가 종합예술이요 표현의 자유로운 형태일진대 혁신적이었던 미술가 달리의 영화인으로서의 이중등록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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