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신문에서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대규모의 유대인 학살 추도 기념물을 세웠다는 뉴스를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독일에는 2차 대전서 사망한 독일군을 위한 기념물은 없는 것인가 하고 자문한 바 있다. 독일 곳곳에는 독일 국민들이 조국이 저지른 만행을 뉘우치고 또 화해와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세운 유대인 학살 추도 기념물들이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국민들까지 2차대전 때 자기 나라가 저지른 만행을 부인하고 미화하는 밴댕이 소갈머리를 가진 일본인들에 비교하면 독일인들은 훌륭한 국민들이다.
베를린 시내 유대인 학살 추도 기념물은 과거 분단독일의 상징과도 같았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나는 며칠 전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잠시 이곳을 찾아갔었다. 각기 규모가 다른 상자 모양의 2,900개의 돌이 수백만의 죽음을 잿빛 침묵으로 조의하는 듯했다.
이번 나흘간의 독일 방문은 전쟁 말기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 처형당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이야기를 스릴러 식으로 만드는 ‘발키리’(Valkyrie·관계기사 ‘위크엔드’판)의 제작사인 UA의 현지 세트방문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발키리’는 바그너의 오페라 ‘링’ 사이클에 나오는 신 보탄의 딸 이름으로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작전명이다.
탐 크루즈가 폰 슈타우펜베르크로 나오는데 그는 부활한 UA의 공동사장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새 UA의 두번째 작품인데다가 크루즈의 회심의 작품이어서 그는 전례 없이 영화촬영 도중 마련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회원들과의 리셉션에 모습을 나타냈다. 크루즈는 근 1시간가량 꼼짝도 않고 한 자리에 서서 우리들의 질문공세에 낮은 음성이나 힘 있게 대답을 했다. 매우 진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의 각본을 쓴 크리스 맥쿼리는 몇 년 전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에 의해 영화의 내용을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때 자신의 시내관광을 안내하던 사람이 “독일 곳곳에는 유대인 학살 추모기념물이 있지만 독일군을 위한 기념물은 볼 수가 없다”고 말한 뒤 “베를린 시내 벤들러블록 내 코트에 있는 기념패가 유일한 기념물”이라고 알려주었다는 것.
나와 몇 명의 동료 회원들은 크루즈를 만난 이튿날 저녁 안내원의 인솔로 벤들러블록을 찾아갔다. 우리 숙소인 전 장벽이 세워졌던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들러블록은 과거 독일의 전쟁성 건물로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고 그와 암살시도 공모자 4명이 함께 총살당한 곳도 바로 이 건물 내 코트에서다.
전후 복구된 건물은 우중충한 분위기였는데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이 총살당한 자리에는 쇠로 만든 레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건물 한쪽 벽에는 처형당한 5명의 이름과 그들의 행동을 기리는 간단한 내용과 함께 화환이 걸려 있다(사진). 총살 직전 “우리의 거룩한 독일만세”라고 외친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의 영웅으로 취급받고 있는데 그의 거사가 성공되었더라면 세계사가 바뀌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들의 저항운동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시도도 마찬가지다. 그의 거사는 제임스 메이슨이 독일군 롬멜 장군으로 나온 ‘사막의 여우’(The Desert Fox·1951)에서 묘사됐다.
독일의 고위 장교들은 나치스 당원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을 뿐이다. 그러나 히틀러가 ‘미치광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독일군 일부 장성 및 영관급 군인들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었다.
몇 차례의 히틀러 암살시도가 실패한 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자신이 직접 히틀러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히틀러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20일 동프러시아에 있던 히틀러의 지휘본부인 ‘늑대의 잠자리’ 내 작전실 테이블 밑에 폭탄이 장치된 서류가방을 놓고 나왔다. 폭탄은 터졌으나 두꺼운 목재 테이블이 방탄작용을 해 히틀러는 부상만 당했다.
히틀러가 죽지 않자 쿠데타 계획은 무산됐고 폰 슈타우펜베르크 및 4명의 암살 공모자들은 거사 불과 몇 시간 뒤인 7월21일 새벽 0시30분에 총살당했다. 나머지 공모자들은 이들보다 훨씬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땅거미 짙어가는 무렵의 처형 현장은 역사의 때처럼 어두컴컴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듯 했다. 거사 불과 10개월 뒤 히틀러의 자살로 유럽전쟁이 끝난 것이야말로 역사의 장난같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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