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31일 같은 날 세계영화계의 두 거목인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89)과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94) 감독이 각기 세상을 떠났다. 두 감독은 인간의 영혼과 내면을 천착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영상 명상가요 철학자들이었던 이 둘이 남기고 간 공간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 할 것이다.
영혼과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던 베리만에게는 ‘신앙 3부작’이 있다. 요양소에서 퇴원한 정신병을 앓는 여인과 그의 남편과 아버지와 남동생의 드라마인 ‘어둠의 유리를 통해서’ (Through a Glass Darkly 1961)와 믿음에 대해 회의하는 작은 마을 신부의 얘기인 ‘겨울 빛’(Winter Light 1963)과 북구의 한도시의 호텔에 묵는 좌절감에 빠진 동성애자와 어린 아들이 있는 프리 러브를 구가하는 어머니인 두 자매의 강렬한 드라마 ‘침묵’(The Silence 1963)이 그 것들이다.
내가 권하고 싶은 베리만의 다른 두 영화는 십자군 전쟁서 귀향하는 기사와 죽음이 체스 게임을 하는 삶의 문제를 묻는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1956)과 베리만의 어린 시절에 관한 눈부시게 화려하고 풍요로운 197분짜리 자전적 드라마 ‘화니와 알렉산더’(Fanny and Alexander 1983)이다.
베리만과 안토니오니는 모두 고독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베리만에게 ‘신앙 3부작’이 있듯이 안토니오니에게는 ‘고독 3부작’이 있다. 안토니오니는 전후 이탈리아 중상류층의 영혼 없는 남녀들의 고독과 권태와 안일과 대화 부재와 소외와 감정의 황폐화를 미니말리즘 수법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의 인물들이 이탈리안들이긴 하지만 고독과 권태와 소통부족에 이탈리아제와 한국제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어서 난 안토니오니의 예언자적이요 미술가적이며 또 의학적이요 심판관적인 고독에 관한 이 3부작을 매우 좋아한다.
셋 중 첫 번째가 안토니오니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라벤투라’(L’Aventura·모험 ·1960)이고 나머지가 ‘라 노테’(La Notte·밤·1961)와 ‘레클리세’(L’EClisse·일식·1962)이다. 나는 지금도 고등학생 때 서울의 명동극장에서 ‘일식’(사진)을 봤을 때 느꼈던 경이감과 궁금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로마의 물질적인 스탁 브로커 알랑 들롱과 교양있는 상류층 여인 모니카 비티의 짧은 사랑의 이야기인데 둘은 사랑 하기 위해 만났다기보다 헤어지기 위해 만났다고 해야 더 옳다. 마지막에 둘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 카메라가 태양이 기신거리며 내려 쬐는 사막처럼 황량한 도시의 골목들을 경찰이 범인 체포하듯 찍은 촬영이 신비하게 아름다운데 가히 묵시록적이다. ‘라벤투라’와 ‘라 노테’ 역시 권태와 고독과 대화부재와 감정의 황무지들이 병적일 정도로 게으르게 묘사된 영화다. ‘라 노테’에서 남보다 더 못한 사이인 부부로 나오는 잔느 모로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대화 없이 황량한 길을 터덜 터덜 걷는 모습을 보면 속이 다 뒤집힐 것 같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안토니오니의 많은 영화들은 결말을 맺지 않고 끝이 나는데 그런 의문 부호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어서 마음에 든다. 안토니오니의 고독과 권태를 보느라면 그 건조감에 입 천정이 쩍쩍 달라 붙을 지경이다. 그의 고독과 권태와 무료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서울의 복날 밤 열기와 습기처럼 끈적거리는데 결국 무기력감에 ‘날 잡아 잡수’하고 손을 들게 된다. 그게 차라리 편하다.
‘고독 3부작’에는 모두 안토니오니의 애인이었던 비티가 나온다. 비티는 허여멀건 얼굴에 어딘가 먼데를 바라 보는듯한 눈을 지닌 약간 정신 나간 여자 같아서 고독과 감정 부재와 권태의 상표처럼 느껴진다. 안토니오니는 대사보다 카메라로 말 하는 사람이어서 그의 영화는 시각미가 빼어나다. 특히 그는 느려빠진 고독과 권태의 속성을 롱 테이크로 묘사했고 황량한 풍경과 텅 빈 화면 구성으로 감정의 불모를 나타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로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그의 첫 번째 영어영화 ‘확대’(Blowup 1966)이다. 자기 카메라에 우연히 살인장면이 찍혀진 영국패션 사진 작가의 이야기인데 매우 상징적이요 애매 모호하다. 그의 70년대 걸작은 역시 영어영화인 ‘여객’(The Passanger 1975)이다. 잭 니콜슨이 나오는데 나라는 조건과 나의 삶이라는 주어진 여건을 탈출하려는 한 개인의 무모한 노력을 염세적으로 그린 실존주의적 스릴러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너무 느리고 지적이요 또 애매해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명제들은 현대인들이 한번 도전해 볼만한 상대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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