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강가 벤치에 앉아 바라본 자유의 여신상은 방황하다 돌아온 아들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어머니 같았다. 그 것이 저 멀리 있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실 나의 어머니와도 같은 아득한 거리감을 주면서 나를 막연한 그리움으로 채워 놓았다. 강가 일본음식점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 나라가 내게 준 자유를 고마워했다.
10여년 만에 다시 들른 뉴욕은 여전히 마천루의 미로들로 방문객을 유인했다. 그 미로로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극감이 신 맛이 난다.
웨일즈 태생의 미녀로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내인 캐서린 제이타 -존스가 나오는 요리가 있는 코믹한 로맨스 영화 ‘예약 불요’(No Reservations·7월27일 개봉)의 시사회와 기자회견에 초청 받아 지난 주말 뉴욕엘 다녀왔다.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도착해 꼭 찾아볼 곳으로 9.11 테러로 무너져 내린 월드 트레이드 센터(WTC)가 있던 그라운드 제로를 정했다. 잠시나마 현장에서 역사감을 느끼고 싶었다.
개를 위한 메뉴가 있는 맨해턴 파크 애브뉴와 61가의 호텔 근처 지하철 정거장에서 한글 안내문이 있는 자동판매기로 2달러짜리 표를 산 뒤 다운타운행 R선을 탔다. 습기와 열기로 뜨거운 한낮 그라운드 제로 주위는 방문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오래 전 영화에서 킹콩이 떨어져 죽은 WTC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그 압도적 위용을 자랑하던 쌍둥이 건물이 폭삭 내려앉은 자리는 지금 새 건물 건축을 위한 기초공사로 분주했다(사진). 철조망 사이로 그라운드 제로를 내려다보면서 이라크 전쟁을 생각했다. 우리는 결코 함께 잘 지낼 수 없는 것일까.
배터리팍을 돌아 곧 머독이 들어설 월스트릿 근처에 있는 황소 조각상 앞에 도착했다. 황소를 붙들고 온갖 국적의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요즘 활활 타는 다우지수처럼 황소의 콧김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어 조지 워싱턴 장군의 부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 중령의 무덤이 있는 트리니티교회 안에 들어가 예배석에 앉아 더위와 세속적 마음을 함께 식혔다. 브로드웨이 길 양쪽으로 늘어선 노점상들은 모두들 자메이칸 액센트를 썼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로우어 맨해턴을 걷고 싶었지만 너무 더워 다시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영화를 보고 브로드웨이에 있는 프랑스 요리학교에서 제이타 -존스와 그의 상대역인 아론 에카르트에게 요리를 가르쳐준 셰프 마이클 와이트와 제이타 -존스의 질녀로 나온 꼬마스타 애비게일 브레슬린에게 팬케이크 만들기와 양파 껍질 벗기는 법을 가르쳐 준 셰프 리 앤 웡의 요리시범을 구경했다. 이들이 즉석에서 만들어준 트러플소스를 칠한 버섯을 곁들인 라비올리와 스캘롭을 레드 와인과 곁들여 먹으니 만복감에 낮에 피곤했던 몸이 나른해졌다.
뉴욕의 밤이 아까워 11시반쯤 호텔을 나와 플라자 호텔로 향했다. 히치콕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 케리 그랜트가 마티니를 마시러 들렀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됐던 오크룸 바에서 한 잔 하고 싶었다. 그런데 뉴요커에게 길을 물어보니 플라자는 현재 2년째 호텔 콘도로 개조 공사 중이라고 한다. 그제야 오래 전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나는 방향을 틀어 유서 깊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로 갔다. 시나트라가 부르는 ‘올드 데블 문’이 흘러나오는 호텔 내 ‘서 해리스’ 바에 앉아 J&B 온 더 락스를 시켰는데 한 잔에 14달러9센트. 비싸네. 뉴욕과 LA는 틀린 점이 여러 가지지만 호텔 바나 식당에서 틀어놓는 음악부터 다르다. 뉴욕은 재즈성 음악인 반면 LA는 주로 요즘 팝송을 튼다.
난 오래 전 전두환이 대통령 자격으로 미국에 왔을 때 취재차 뉴욕에 와 아스토리아 호텔서 잔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일보의 왕고참으로 뉴욕 특파원을 오래했던 김태웅 선배가 LA서 ‘촌놈’이 왔다고 아스토리아에서 한 번 자는 것도 추억이라며 방을 얻어 줬었다.
돌아오는 날 시간이 좀 남아 센트럴팍을 산책했다. 공원 잔디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뉴요커들을 감상하면서 어슬렁어슬렁 걷자니 진짜 맨해터나이트 우디 앨런이 또 다른 맨해터나이트 거쉬인의 ‘라프소디 인 블루’를 오프닝 장면에서 멋있게 쓴 영화 ‘맨해턴’이 생각났다.
공원을 빠져 나오면서 플라자 호텔에 걸린 광고를 보니 제일 싼 방이 150만달러다. 아마도 손바닥 만한 방이리라. 뉴요커들은 여전히 빨간 불에 길을 건넜고 자동차들도 여전히 죽어라하고 경적을 울려댔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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