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더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산을 갖고 다니는 까닭을 지난주 몸으로 겪고 왔다. 영화 ‘트랜스포머즈’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의 시사회와 기자회견에 초대받아 런던에 머문 닷새간 날씨는 내내 흐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비는 수다쟁이의 잔소리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기를 계속했다.
런던에 퍼브(pub-public house의 약어로 맥주집)가 많고 버버리코트가 유명한 이유를 알만했다. 런던 시내 워털루 역에서 기차로 10여분 거리의 윔블던에 있는 아파트로 나를 저녁 초대한 런던의 대학 교수 이석배씨의 아내 오지명씨(한국일보 선배겸 전 해외동포재단이사 김승웅씨 질녀)는 “런던의 비는 여기 사람들이 마시는 차와도 같은 것”이라고 일러줬다.
“서” “서”하는 호텔 포터에게 1파운드의 팁을 주고 여장을 푼 뒤 나는 곧바로 퍼브를 찾아 갔다. 인파로 붐비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토텐햄 퍼브에 들러 여자 바텐더가 권하는 대로 에일 런던 프라이드를 쭉 들이켰다. 영화에서처럼 퍼브는 퇴근길 시민들로 돗데기시장을 방불케 했는데 저 뒤쪽에서 한국 유학생 셋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에일은 영국 특산물로 맥주보다 독하고 써 비터라고도 부른다.
바쁜 일정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관광버스 빅버스를 타고 주마간산 식으로 런던 시내를 둘러봤다. 이 날도 비는 신음하듯이 오락가락 했다. 빅벤 앞을 지나는데 빅벤이 열두 점을 친다. 버킹엄궁에서 내려 장난감 병정 같은 위병을 카메라로 찍은 뒤 나도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스와 다이애나가 결혼한 세인트 폴스 성당, 수많은 왕족과 귀족의 목이 달아난 런던타워, 조 스태포드가 노래 부른 런던 브리지와 뉴 앤드 올드 스코틀랜드 야드 그리고 초서와 뉴턴등 영국의 VIP들이 묻혀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하이드팍 및 코벤트 가든과 피카딜리 서커스와 트라팔가 광장 등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구경했다.
난 늘 런던 시내 길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와 옛날 한국에서 본 것과 같은 우체통과 2층 버스의 색깔이 왜 빨간지가 궁금했었다. 그래서 만나는 영국 사람마다 물어봤는데 모두들 모른다는 대답. 그런데 런던 시내 곳곳에는 감시 모니터가 설치돼 있어 조지 오웰의 세상을 생각나게 했다.
런던에 오기 전 꼭 걸어 건너리라고 다짐했던 것이 템즈강 위의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사진)다. 이 다리 이름은 로버트 테일러와 비비안 리가 나온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 영화 제목으로 쓰여졌는데 우리나라 말로는 ‘애수’(1940)였다. 2차대전 때 공습중에 이 다리에서 만난 귀족 가문의 미남 장교 테일러와 아름다운 발레리나 리의 러브 스토리는 손수건이 여러 장이 필요한 추억의 멜로드라마다. 리는 창녀가 돼 워털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몸을 팔다가 안개가 자욱한 이 다리 위에서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어 자살한다(그러나 영화는 할리웃 세트서 찍었다).
나는 이 다리를 두 번 걸어 건넜다. 처음에는 이 교수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워털루 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다리를 지나 들어선 워털루 역이 구식이어서 막 기차에서 내린 로버트 테일러라도 만날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늦은 오후에 혼자 다시 다리를 찾아갔다. 다리를 거의 다 건널 즈음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비 내리는 워털루 브리지가 여객의 한산한 마음만큼이나 센티멘탈해 보었다.
깨끗하고 넓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뒤 런더너처럼 우산을 왼팔에 걸고 호텔 근처의 퍼브 셰익스피어스 헤드에 들렀다. 나는 모리셔스에서 온 여대생 바텐더가 권한 페디그리 비터를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맥주통 배를 한 아저씨들이 많았다. 이씨는 영국 사람들은 은퇴 후 꿈이 퍼브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만큼 퍼브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의 기차와 버스와 튜브(지하철)를 모두 타보고 느낀 점은 런던의 대중교통수단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언더그라운드(서브웨이)에서 튜브를 타려면 평양처럼 가파르고 깊은 경사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지붕 위의 버섯처럼 올라앉은 굴뚝들이 디킨스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런던의 물가가 엄청나게 비싼 반면 달러가는 요즘 미국의 해외 인기처럼 형편없다. 호텔서 100달러를 냈더니 43파운드 몇 펜스를 준다. 미국 사람들이 말끝마다 “댕큐”를 쓰듯 런던사람들은 “러블리”를 쓰는데 듣기가 참 좋다. 떠날 때면 늘 남는 미련을 두고 돌아왔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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