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던 1960년대 한국에서는 반공영화가 양산됐었다. 이만희 감독이 만든 ‘7인의 여포로’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이 그 대표작인데 언론과 예술의 숨통을 조여대던 당시에 ‘반공을 국시로 삼는’ 혁명공약의 비위를 맞추기에 이보다 더 좋은 영화도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영화 속 북한군 장교의 군화가 반짝거린다고 해서 당국이 용공을 내걸고 시비를 걸던 때로 자다가 웃을 별 하찮은 이유로 예술가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만희도 ‘7인의 여포로’가 화근이 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됐었다.
그때 반공영화와 함께 성했던 또 다른 장르가 소위 문예영화였다. 문학작품을 영화화 한 것들로 김수웅의 ‘갯마을’이 히트하면서 이만희의 ‘물레방아’ 등 숱한 문예영화가 쏟아져 나왔다. 이 장르 역시 용공시비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 데다가 당국은 국민들의 시선을 멜로드라마 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이 장르를 독려했었다. 1960년대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였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러시아 영화계의 거봉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1898~1948)이 애국적인 대하 스펙터클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1938)를 감독한 경우도 1960년대 한국 감독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오데사 계단의 대학살 장면 몽타주로 잘 알려진 ‘전함 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으로 유명한 에이젠스타인은 당시 인간 도살자 스탈린 정권 하에서 ‘형식주의자’로 찍혀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러시아의 전설적 구국 영웅 알렉산더 네브스키에 관한 영화제작의 기회가 주어지자 에이젠스타인은 잽싸게 이를 수락했다.
13세기 러시아를 침공한 독일군을 물리친 네브스키의 전공을 찬양한 이 영화를 보면 애국적이다 못해 스탈린 홍보영화가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다. 네브스키는 스탈린의 대리인임이 분명한데 영화가 만들어진지 3년 후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가 패하고 퇴각한 것이 영화 내용과 판에 박은 것처럼 같다. 특히 후반부에 장시간 진행되는 ‘얼음 위의 전투’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네브스키가 1242년 4월5일 농민들을 동원한 군대로 사납기 짝이 없는 독일군을 얼어붙은 페이푸스 호수 위에서 맞아 협공, 궤멸하는 장면(사진)은 하나의 교향적 그림과도 같은 장관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러시아의 동장군에 나가떨어진 역사가 연상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걸작성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완벽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알렉산더 네브스키’는 음향과 광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대표적 영화로 에이젠스타인은 영화를 만들 때부터 효과의 필수적 요소로 음악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가 작곡을 의뢰한 사람이 프로코피에프인데 당시 서양에서 오래 살다 귀국한 프로코피에프도 당국의 눈총을 받고 있을 때였다. 에이젠스타인과 프로코피에프는 서로 각기 영상과 음악을 따로 먼저 만들어 주고받으며 작품을 완성했다. 영화를 보면 음악과 영상의 상호작용을 잘 느낄 수 있는데 음악이 없었더라면 영화의 위대성은 절감되었을 것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자신의 영화음악을 후에 풀 오케스트라 콘서트 연주를 위한 교향곡 규모의 칸타타로 확대 편곡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작곡가 윌리엄 D. 브론이 1987년 영화 상영과 함께 오케스트라가 실제 연주하는 음악으로 재구성했다.
지난 3일 다운타운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필이 올 시즌 마지막 콘서트로 연주한 ‘알렉산더 네브스키’를 영화와 함께 감상했다. 에사-페카 살로넨의 지휘로 2시간가량 진행된 연주는 장엄하고 힘차게 휩쓸어가면서 심금을 울리는 위력을 발휘했다. 영화에서 대사가 나올 때면 살로넨은 지휘를 멈추고 단 위에 서서 자기 앞의 작은 모니터를 통해 영화를 관람했는데 모니터 옆에 놓인 시계바늘이 영화 상영시간에 따라 움직였다.
살로넨의 지휘는 뜨겁고 활기가 넘쳤는데 종과 징을 비롯한 풀 오케스트라와 합창과 메조소프라노가 삼위일체가 돼 자아내는 음악은 가히 올림퍼스적이었다. 음악이 끝나자 청중들이 환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
‘알렉산더 네브스키’의 성공으로 에이젠스타인과 프로코피에프는 일종의 복권을 했다. 둘은 또 다른 걸작으로 2부로 구성된 ‘공포대제 이반’(Ivan the Terrible·1944)에서도 함께 일해 제1부로 스탈린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제2부는 스탈린의 눈에 안 들어 세 사람이 모두 죽고 난 뒤에야 상영됐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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