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추억한다는 것은 가슴 속에서 비린내가 나는 일이다. 겸연쩍고 부끄럽고 황당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물밀듯이 그리워지며 추하고 속되고 슬펐던 것까지 모두 아름다워진다.
내가 김승웅이 지은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김영사 출판)를 읽고 느낀 심정이 바로 그랬다. ‘서울 회억, 1961-1984’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나의 한국일보 선배기자이자 친구인 김승웅의 귀거래사다.
제목처럼 김승웅은 비장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 혁명 전야의 제정 러시아 청년 장교를 연상하곤 한다. 그는 정열과 사명감이 투철한 로맨티스트인데 흠이라면 성질이 불같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는 것. 그는 또 깡다구가 있는 재사이기도 하다. 김승웅은 미주 한국일보에 1년 반 남짓 연재한 동포 칼럼을 통해 해외 독자들에게도 낯이 익은 전직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이다.
김승웅은 서울 마포의 숭문고를 나와 서울 문리대 외교학과에 들어간 똑똑이로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위지만 신문사는 기수로 6년 선배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친구인데도 그는 지금까지도 옛날 신문사서 하던 버릇대로 내게 되게 형 행세를 해댄다.
그의 글을 읽자니 대학 시절과 신문사 시절의 그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서로 포옹을 하며 포개지는 것 같다. 한 가지 주제로 장문의 칼럼을 쓰고 나면 그 글과 인연이 있는 전 세계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써 보낸 짤막한 댓글을 모아 만든 책인데 문체가 자기 생긴 대로 날카롭고 패기가 있다. 김승웅이라는 한국 언론계의 산 증인의 과거와 내막과 인간성 그리고 장기영 사주 시절의 패기와 정열로 들끓던 한국일보사 안의 풍경과 그의 취재 행적과 함께 모질고 사나웠던 군정시절의 한국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자신과 한국일보와 한국의 역사를 비판하고 통탄하고 그리워하면서 군화정권이 싫어 파리로 특파원이 되어 떠나는 것으로 글을 맺고 있다. 그의 문재가 번득였다.
읽으면서 김형과 내가 닮은 점이 꽤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둘 다 모두 가난했고 술과 여자와 노래를 좋아했고 술에 취하면 18번으로 ‘찔레꽃’을 불렀고 경찰 취재에 약했고 김포공항 출입기자였으며 죽은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또 서울대(나는 사대)를 나왔다는 것까지 닮았다. 김형은 공항시절 얘기를 ‘공항의 로맨티시즘’에서 상세히 적었는데 그와 나는 공항출입 시절 서로 모르게 그 곳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둘 다 철딱서니 없게 시리 로맨티스트라는 점 때문에 그와 나는 서울 한국일보 시절 한 번도 같은 부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아우 형하며 친구가 됐던 것 같다.
자기를 비롯해 자기와 친한 사람들을 모두 푼수라 부르는 김승웅은 파리에서 오래 살아 술을 한 잔 걸치면 ‘찔레꽃’ 말고도 ‘고엽’을 불어로 감정 섞어 기차게 잘 부른다. 그는 파리 외에도 미국과 일본 등 해외생활을 많이 했는데 옛날 한국일보 시절부터 약간 서구적이었다. 그는 또 당시 박봉이었는데도 옷을 아주 멋있게 입고 다녔다. 무슈 킴이었다. 나도 할리웃 영화에 미쳤던 탓인지 일찌감치 서양적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이 점도 우린 닮았다. 난 그래서 서울 한국일보 시절 일부 수구적인 선배들로부터 양키적이라는 야유를 받았었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절절했던 것이 군정시절 우리가 겪은 수모와 비참함이었다. 그는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에서 ‘매일 저녁 각 신문사 기자들이 물 적신 신문대장을 들고 권총 찬 보도검열관 앞에서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때’라고 계엄 하의 상황을 적고 있다. 그때 대장을 들고 검열관 앞에 서 있던 기자가 바로 나였다. 난 그 때 매일 저녁 몇 번씩 대장을 들고 신문사 지프를 타고 한국일보가 있던 중학동에서 검열관이 있던 시청까지 왕래했었다. 총 찬 검열관 앞에 섰을 때 느꼈던 스스로 비천해지는 마조키스틱한 쾌감이 아직도 짜릿짜릿하다. 모멸의 시대였다. 이런 것이 하나의 이유가 돼 김형이 파리로 달아났듯 난 LA로 왔다.
김형은 LA에 올 때면 꼭 날 불러내 밥과 술을 사 먹이는데 예나 지금이나 날 보는 눈이 마치 제 새끼 보는 듯이 정이 흠뻑 고여 있다. 몇 년 전 그가 LA에 왔을 때 묵고 있던 호텔로 찾아갔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읽던 성경책이 닫히지 않은 채 놓여 있지 않은가. 그는 새벽기도를 나가는 진실한 기독교 신자인데 난 김승웅과 기독교 신자를 아무리 오버랩 시키려고 해도 잘 안 된다. 김승웅은 다음 책에서는 파리 시절을 쓰겠다고 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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