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유혈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거론되는 것이 사건과 영화의 모방범죄 상관 가능성이다. 조승희가 NBC-TV에 보낸 두 손에 망치를 든 사진이 방영되자 뉴욕타임스는 이 사진이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대수(최민식)가 오른 손에 망치를 든 모습(사진)과 같다며 사건과 영화의 상관 가능성을 내비쳤다.
박찬욱이 감독한 ‘올드보이’는 망치와 칼과 총을 동원한 잔인무도한 유혈 복수극이다. 박 감독의 재능을 읽다가도 영화가 너무 끔찍해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내 배 째라’식의 폭력극이다. 이 영화는 2004년 칸 영화제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는데 그 것은 그 때 심사위원장이었던 폭력중독자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적극적 지지 때문이었다.
그럼 과연 조승희가 ‘올드보이’에 영향을 받아 범행했을까. 그건 조승희만이 알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조승희의 반사회적 광기가 너무 심각하다. 조승희는 ‘올드보이’보다는 차라리 컬럼바인 학살의 두 장본인인 틴에이저들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 다 사건의 현장이 학교라는 것과 조가 남긴 노트에 두 범인의 이름이 거론됐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컬럼바인 사건 때도 두 틴에이저가 영화 ‘메이트릭스’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긴 외투를 입었다고 해서 사건과 ‘메이트릭스’를 연관시키는 해프닝이 있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카인과 아벨의 사건을 모방했다는 말이 나오듯이 센세이셔널한 폭력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유혈폭력 영화다. 그러나 도매금으로 폭력영화를 실제 사건을 부추긴 장본인으로 볼 수는 없고 이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뤄야 한다.
살인범들이 본인들 입으로 어느 영화를 보고 그 내용을 따라 했다고 고백한 경우의 대표적 케이스가 스탠리 큐브릭의 ‘클라크워크 오렌지’(1971)와 올리버 스톤의 ‘내추럴 본 킬러즈’(1994)다. ‘클라크워크 오렌지’ 경우 영국의 틴에이저들이 영화에서처럼 노래 ‘빗속에 노래하며’(Singin’ in the Rain)를 부르며 소녀를 강간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도 역시 영화 내용처럼 3명의 틴에이저들이 노숙자 여인을 재미로 불태워 죽였다. 큐브릭은 영화의 모방범죄가 발생하자 1973년 영화의 영국 내 상영을 취소해 버렸었다.
또 오클라호마의 두 10대 연인은 ‘내추럴 본 킬러즈’를 흉내 내 살인을 해 당시 화제가 됐었다. 이 사건 뒤 희생자의 가족이 영화 제작자와 감독 등을 상대로 고소를 해 7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피고측 승리로 끝났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된 미국에서는 영화와 실제 사건이 직접 관계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하면 법원은 거의 절대적으로 영화측 편을 들어주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가 그렇듯이 표현의 자유에도 책임이 따르게 마련인데 요즘 미국서 극성을 떠는 유혈폭력 공포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유만 누리지 책임은 방기하는 것 같다.
문제는 ‘톱’과 ‘호스텔’ 같은 눈 뜨고 보기 힘든 잔혹한 영화가 노리는 대상이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10대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영화들의 등급은 부모나 성인의 동반 없이는 어린 아이들이 입장할 수 없는 R이지만 감관이 얼얼하도록 자극적인 스릴러를 즐기는 아이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영화를 보게 마련이다.
특히 미국 영화는 유럽 영화보다 폭력이 훨씬 잔인하고 끔찍한 반면 섹스에는 과민하게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은 사람들의 목과 팔 다리가 날아가는 것이 자연스런 인간행위인 섹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고 비아냥댄다.
나는 얼마 전 현재 상영 중인 피범벅 액션 스릴러 ‘그라인드하우스’의 감독 타란티노와의 인터뷰에서 그에게 이런 사실에 대해 물어본 바 있다. 타란티노는 “아이들에게 폭력영화를 보여주느냐 안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는 부모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특성 중 하나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면서 흥분감을 느끼는 것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젊은이들이 자살했다고 해서 괴테를 나무랄 수 없듯이 근본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영화에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폭력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1919년 올리버 웬델 주니어 미 연방대법원 판사가 한 말을 한번 되새겨 볼 만하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명백히 보호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만원극장 안에서 ‘불이야’라고 소리 칠 권리는 없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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