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음악하면 언뜻 느껴지는 것이 무성한 숲의 호흡 같은 하모니와 아름답고 우수에 젖은 멜로디다. 여러 작곡가 중에서도 영혼 가득한 로맨티시즘이라는 러시아 정신을 잘 표현한 사람들이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인데 이들의 음악은 서정적이요 정열적이면서 아울러 전체적으로 짓누르는 듯한 비감에 젖어 있다. 특히 두 사람의 멜로디는 부끄러운 줄 모르도록 감정적인데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왠지 모르게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의사 자바고’가 생각나곤 한다. 두 작곡가의 음악의 성질이 감상적이다시피 해서 이들의 음악은 팝송으로 편곡돼 노래 불러지고 또 영화음악으로도 즐겨 사용된다.
지난 3일 저녁 UCLA의 로이스 홀에서 블라디미르 스피바코프의 지휘로 러시아 국립필하모닉(NPR)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제5번 교향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프소디’는 팝클래식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들이다.
단단한 체구에 짧은 잿빛 머리를 한 스피바코프는 극적이요 확신에 찬 제스처(스토코우스키의 제스처를 연상케 했다)를 써가며 리드미칼 하면서도 풍성하고 우람찬 음을 자아냈다. 듣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연주였다.
먼저 쇼스타코비치의 경쾌한 ‘축제 서곡’이 연주된 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형태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프소디’가 연주됐다. 이 곡은 피아노협주곡 제2번(리즈 테일러가 나온 고전음악과 사랑의 영화 ‘라프소디’에 나온다)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다. 24개의 변주곡이 절묘한 구조를 이루며 전 음이 다음 음을 파생시키듯이 이어지는데 다변한 감정을 지닌 이 음악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사랑의 영역’이라 불리는 중간 부분. 그리움에 젖어 노래 부르듯 하는 멜로디가 간드러진데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사랑의 묘약으로 쓰면 좋을 음악이다. 멜로디가 센티멘털하니 만큼 이 음악은 감상적인 비련의 영화 ‘시간 속 어느 곳에’(Somewhere in Time·1980)서 계속해 흐르면서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젊은 극작가(작고한 크리스토퍼 리브)가 시간을 너머 과거로 찾아가 아름다운 여배우(제인 시모어)와 못 이룰 사랑을 나누는 내용인데 변주곡의 테마가 영화의 로맨틱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날 피아노 연주는 러시아 태생의 젊은 여류 피아니스트 올가 컨(30·사진)이 했다. 금발과 따가운 대조를 이루는 등이 훤히 드러난 끈 없는 빨간 드레스 차림의 올가는 강한 음을 칠 때는 X-레이 사진에 나타나듯 등뼈가 드러날 만큼 건반을 두드리다가 약한 음에 가서는 얼굴이 거의 건반에 닿도록 고개를 숙여가며 음을 조심해 심는 듯했다.
나는 지난 2001년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경연대회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을 쳐 여자로서는 대회 사상 30년만에 처음으로 금메달을 탄 올가의 연주를 같은해 8월 어바인에서 있은 콘서트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 날도 올가는 소매 없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연주했었다. 그 때 연주를 듣고 적은 글을 뒤져 보니 ‘정열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룬 격정적이요 민감한 연주였다’고 적혀 있다.
지난 3일의 올가의 연주 제스처는 5년여 전과 똑같았다. LA타임스의 마크 스웨드는 이 날 올가의 연주에 대해 ‘자기 과시’라고 평했는데 제스처가 마치 로맨틱한 비극을 무언극 연기하는 듯해 음악 감상에 다소 방해가 됐다. 여자 랑-랑이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이 연주됐다. 차이코프스키가 ‘운명 앞의 절대적 인종’이라고 말한 이 음악은 동성애와 도박으로 고민이 많았던 그의 어두운 고뇌와 그 특유의 우울하고 로맨틱한 멜로디 그리고 마지막의 맹렬한 자기 긍정이 뒤엉킨 전형적인 러시아 교향곡이다. 스피바코프와 교향악단이 열정적으로 음들과 씨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맨 처음 혼이 시작하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2악장은 무드 짙고 비통하면서 달콤하다. 그 주제가 감미로운 한숨과도 같아서 왕년의 팝클래식의 명지휘자 안드레 코스탈레네츠에 의해 ‘문 러브’(Moon Love)로 편곡돼 프랭크 시내트라와 델라 리스 등 여러 가수가 노래 불렀다. ‘이것이 문 러브인가요’라고 시작되는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내가 고독한 눈물로 당신의 키스를 갚아야 한다면 그것은 문 러브가 아니라고 말해 주오/그것이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해 주오/달이 사라지거든 당신은 내 것이 되리라고 말해 주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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