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영 중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태평양 전쟁 중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우리 아버지들의 기’(Flags of Our Fathers)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미 해병이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전 섬에 대한 해군함정의 함포사격이 계속되는 동안 해병들이 대기하는 군함내 홀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낭랑한 여자 음성의 영어방송이 흘러나온다. 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한 일본측 선전방송인데 내용은 주로 “당신들은 왜 무모한 전쟁에 참가해 고생하느냐.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아내와 애인이 그립지 않느냐. 그러니 항복해라”라는 것들.
이런 기죽이는 말끝에 꼭 미국의 인기 팝송들을 내보내는데 그 중에서도 자주 쓰인 곡들이 ‘굿나잇 스윗하트’와 ‘아일 워크 얼로운’ 이다. ‘우리 아버지들의 기’에서도 선전방송 뒤 다이나 쇼가 부르는 ‘아일 워크 얼로운’(I’ll Walk Alone)이 흘러나오면서 병사들의 가슴을 향수로 젖게 만든다.
‘나 홀로 걸으리/사람들이 왜냐고 물으면 나는 그들에게 내가 모아야 할 꿈들이 있다고 말하리/당신이 날 꼭 끌어안았을 때 우리가 자아냈던/나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으리/매일 밤 당신이 어디에 있던지/매번 기도 속에서 당신이 부르면 나는 당신을 들으리/아무리 멀리 있어도 당신이 눈을 감기만하면 나는 거기에 있으리.’ 달콤하면서도 우수가 깃든 쇼의 노래를 듣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무기력한 고독감이 어른거린다.
이런 장면은 ‘도쿄 로즈’와 제임스 가너가 나온 ‘잠망경을 올려라’ 등 태평양 전쟁을 다룬 영화에 약방의 감초식으로 나오곤 했다.
이 방송의 주인공이 악명 높은 도쿄 로즈다. 일명 ‘가시 돋친 장미’와 ‘태평양의 사이렌’이라 불린 도쿄 로즈는 미군들이 자신들의 사기 저하를 노리고 방송하는 10여명의 여자 아나운서에게 도매금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도쿄 로즈 하면 지난해 9월에 90세로 시카고서 사망한 미국 시민 아이바 토구리로 대표된다. 유독 토구리 혼자 반역죄로 기소돼 옥생활을 6년이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구리는 인종차별과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시 히스테리의 제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1977년 며칠 전 사망한 포드 대통령에 의해 복권이 됐었다.
토구리는 LA의 당시만 해도 백인지역이었던 캄튼에서 태어났다. 걸스카웃에 스시를 싫어하는 미국 소녀로 UCLA를 나왔다. 토구리는 어머니 대신 중병에 걸린 이모를 돌보러 도쿄에 가 있던 중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발이 묶여버렸다.
적국인으로 간주된 토구리가 당국에 의해 강제로 일하게 된 곳이 일본에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로 방송진이 구성된 라디오 도쿄. 끝까지 미국적 포기를 거절한 토구리는 여기서 일하면서 자기 목숨을 내걸고 일본측 선전방송을 사보타주하던 포로들을 도왔다.
틴에이저 음성에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는 토구리는 ‘고아 앤’이라는 가명으로 미군을 상대로 선전방송을 했는데 이 때문에 반역죄로 기소된 것이다. 그러나 전후 토구리가 처음 미군에 의해 체포돼(사진) 조사를 받았을 때만 해도 기소사유가 불충분해 석방됐었다.
토구리가 석방된지 3년만에 다시 체포돼 기소가 된 이유는 당시 공산당 때려잡기의 기수로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방송인 월터 윈첼의 압력 때문이었다. 누군가 미군 사기저하 영어방송의 책임을 지고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결과였다.
토구리가 반역죄를 뒤집어쓰게 된 방송은 단 두 문장. “태평양의 고아들아, 너희들은 이제 진짜 고아들이야. 너희들의 배들이 모두 침몰했으니 너희들은 어떻게 집에 돌아가겠니?” 그러나 이 방송은 연합군측이 해전에서 대승한 다음에 나온 것이었다.
출옥 후 시카고에서 일본상품 가게를 운영하며 조용히 살아온 토구리는 지난해 1월 전시 미군을 도운 공로로 제2차 세계대전 재향군인위로부터 표창을 받은 바 있다. 그러니까 토구리는 도쿄 로즈라는 신화의 제물이었다.
태평양 전쟁에 도쿄 로즈가 있었다면 유럽 전쟁에는 ‘추축국 샐리’가 있었다. 미국시민인 밀드레드 길라스는 라디오 베를린을 통해 미군 사기 저하용 방송을 했었다. 그녀는 반역죄로 12년간 옥살이 후 가석방돼 오하이오서 음악 선생으로 일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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