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남자를 유혹해 파멸의 길로 끌어들이는 여자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시조는 이브일 것이다. 단어 뜻 그대로 이들은 치명적인데 또 다른 팜므 파탈들인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날아가게 했고 카르멘은 방종하다가 결국 호세의 칼에 찔려 죽고 만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2차대전 직후 할리웃서 만들어진 많은 범죄영화에서 팜므 파탈들이 여러 남자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팜므 파탈의 특징은 아이 같은 순진성과 요부의 간계를 공유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이 노리는 남자들은 대부분 봉같은 자들로 여인의 치명적 매력에 마치 불나방이가 불꽃에 분신하듯 한다. 나는 팜므 파탈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소설이나 오페라를 볼 때면 늘 여자가 남자보다 센 생명체임을 깨닫곤 한다.
소설과 음악을 통해 수퍼스타처럼 된 팜므 파탈 중의 하나가 마농 레스코다. 군인, 모험가, 플레이보이 등으로 화려한 삶을 살다가 말년에 신부가 된 프랑스의 아베 프레보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인 마농은 소설과 오페라의 또 다른 주인공인 카르멘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팜므 파탈이다.
카르멘은 비제에 의해 그리고 마농은 마스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는데 두 작곡자가 모두 낭만파들이어서 멜로디가 간드러지게 달콤하고 정열적이요 또 감각적이다. 특히 마스네의 멜로디는 때로 지나치게 부드럽고 감정적이요 또 멜랑콜리한데 그래서 대중이 더 좋아한다. 그의 오페라 ‘타이스’에 나오는 명상곡은 팝튠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마스네의 특징이 화려하게 만개한 오페라가 ‘마농’(Manon)이다. 시종일관 아름답고 서정적이요 뜨겁고 우수에 찬 멜로디의 연속이라고 해도 되겠다. 영국의 명지휘자 토마스 비첨경은 이 오페라를 듣고 “마농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밍고의 지휘로 공연된 LA 오페라의 ‘마농’(21일 마지막 공연)은 야할 정도로 화사했다. 시대를 1950년대(가사도 이에 따라 현대화)의 파리로 옮긴 뒤 마농을 몬로와 마도나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의 탕녀로 만들어 나이트클럽에서 포울댄싱까지 시키는데 보고있자니 스트립 조인트에 들어온 느낌이다. 오페라인지 뮤지컬인지 잘 구별이 안 갔지만 재미는 만점.
16세 난 시골처녀 마농이 수녀원에 들어가려고 가던 길에 만난 귀족 집 아들 슈발리에 데 그류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둘이 파리로 줄행랑을 놓는다. 마농은 데 그류를 사랑은 하지만 돈과 쾌락의 여자. 그래서 애인을 버리고 돈 많은 남자에게 가는데 그 뒤 상심해 신부가 된 데 그류와 재회, 다시 결합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데 그류의 순애보인 ‘마농’을 보면서 드라마가 ‘춘희’와 ‘카르멘’과 ‘토스카’의 부분까지를 접목시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농’의 두 주인공역을 맡아 노래한 안나 네트레브코와 롤란드 비야존은 듣던 대로 천상의 콤비였다. 노래는 물론이요 둘 간의 화학작용이 화끈했는데 마농이 짧은 네글리제 밑으로 드러난 풍만한 넓적다리로 데 그류를 희롱하는 베드신(사진)은 준포르노 영화 보는 기분이었다.
둘의 노래는 황홀했다. 네트레브코의 감각적이요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성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혼미시킬 만하다고 하겠다. 비야존은 황금의 목소리로 달콤하고 비감하며 또 정열적으로 노래했다. 신부가 되기로 한 뒤 부르는 아리아는 비감하다 못해 고울 정도였고 그가 마농에게 자신의 꿈을 얘기해 줄 때는 열정과 동경과 두려움이 끓어 올라 목소리에서 광채가 났다.
세트와 의상도 매우 화려했는데 오페라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두 주인공 외에 인상에 남는 음성은 데 그류 아버지역을 맡은 베이스 데이빗 핏싱어의 것. 한국인 바리톤 형 윤이 마농의 사촌으로 나와 비중있는 역을 맡았다.
‘마농’은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져 알리다 발리와 카트린 드뇌브 등 유럽의 일류 배우들이 팜므 파탈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내게 진한 인상을 남긴 여자가 무르익은 몸에 아이의 얼굴을 한 프랑스 여우 세실 오브리. 그녀는 1949년 20세 때 앙리-조르지 클루조가 감독한 ‘마농’에 나와 하룻밤 사이 스타가 되었다. 죽은 마농을 끌고 데 그류가 끝없는 사막을 걸어가는 라스트신이 참으로 로맨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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