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하오 2시25분 토론토공항에 도착, 숙소에 옷 가방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기자실로 가서 증을 받아 목에 건 뒤 극장으로 달려가 본 첫 영화가 스페인의 화제작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환’(Volver)이었다. 이렇게 나의 여섯번째 토론토 국제영화제(TIFF) 참관이 시작됐는데 16일 귀국 비행기를 탈 때까지 극장에서만 살다온 셈이다.
누가 내게 TIFF에 왜 매년 가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영화와 도시 분위기와 한국을 연상케 하는 가을 날씨 그리고 토론토 시민들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토론토 시민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평일 오전 7시부터 줄을 서는데 이런 사람들과 도시 전체가 영화제에 보내는 열기가 외지인인 내게까지 뜨겁게 느껴 진다.
출품된 350여편의 영화를 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영화 고르는 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사전지식과 현지 신문보도 그리고 극장 안팎에서 듣는 기자들의 촌평을 귀동냥한 것을 취합해 고르는데 매년 그렇듯이 그 결과는 업 앤 다운. 올해는 운 좋게 지난해보다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이번 영화제서 화제가 된 것은 영화제 단골 참석자인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암치료로 불참한 사실과 션 펜이 호텔서 기자회견중 담배를 피운 것. 펜은 법으로 흡연이 금지된 호텔서 자기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 관한 기자 인터뷰 도중 담배를 피워 이 모습이 이튿날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런데 당국은 담배 피운 펜에게는 벌금을 안 매기고 그의 흡연을 못 막았다는 이유로 ‘범죄현장’인 서튼 플레이스 호텔측에 650달러의 벌금을 물렸다.
내 마음에 드는 영화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올 영화제의 영화 선택은 지난해보다 우수했다. 내가 본 40편의 영화 중 지금까지도 여운이 남아있는 영화가 타이완의 차이 밍-량이 감독한 ‘나 혼자 자기 싫어’(I Don’t Want to Sleep Alone)다.
타이페이 후진 동네의 고독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식물인간, 불체자 노동자, 떠돌이 청년과 하녀 등)의 얘기인데 유머와 위트, 페이소스와 연민을 섞어 어두운 사람들의 모습을 아름답고 깊이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사진)은 눈물이 나도록 환상적이요 탈세속적이다. 지기 사이인 뉴욕타임스의 마놀라 다기스(“당신 아들 요즘 뭐하냐”고 물었다)와 버라이어티의 밥 콜러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또 다른 화제작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이숙인이 나오는 ‘쇼트버스’(Shortbus). 숙인을 비롯해 나오는 배우들이 모두 알몸에 성기를 그대로 노출하고 포르노영화보다 더 노골적으로 섹스를 하는데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포르노영화가 아니다. 포르노영화의 형식을 빌린 인간애와 사랑과 포용을 찬양한 감동적인 영화로 이숙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쌓였던 피곤이 말끔히 가시는데 그러다가 러셀 크로우가 처음으로 로맨틱 코미디에 나온 ‘좋은 해’(A Good Year) 같은 영화를 보면 피곤이 겹으로 쌓여 짜증이 난다.
영화를 보러 갔으니까 하루에 평균 5편씩 영화를 보긴 하지만 이게 보통 중노동이 아니다. 나뿐 아니라 많은 기자들의 입에서 “피곤해 죽겠다”는 말이 후렴처럼 나온다. 이런 판에 12일 밤10시50분에 그보다 며칠 전 베니스영화제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중국의 지아 장-케가 감독한 ‘고요한 삶’(Still Life)이 특별 상영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원래 TIFF 프로그램에 없던 것인데 베니스영화제 대상을 받아 필름을 급히 공수해 상영한 것이다.
딱 한번 상영에 일반관객과 함께 입장시킨다는 바람에 상영 1시간 전부터 줄을 섰다가 구경했다. 양자강 댐 공사로 수몰되는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유머와 비감과 향수감을 혼성해 수채화처럼 그린 고요한 작품이다.
밥은 순전히 요기하는 식으로 먹었는데(달러가가 하락 미국달러 $100 주면 캐나다 달러 $108을 준다) 시사회 극장 인근의 퓨전스타일 한식집 비빔 Q(597 Yonge St.)의 주인 아주머니 김금순씨가 “LA에 돌아가면 잘 좀 소개 해달라”며 서비스 반찬을 줬다.
이번 영화제에서 크게 즐거웠던 일은 LA의 친구 C와 그의 부인을 토론토서 만난 것. 둘은 신축된 공연예술관 포 시즌스의 개관기념으로 공연되는 바그너의 ‘링’사이클을 보러 왔다. 저녁에 히틀러의 벙커를 연상케 하는 독일 식당 ‘아마데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과 영화 얘기로 고단함을 풀었다. 귀국하는 날 숙소인 호텔을 나서자니 조금 더 영화를 못 본 것이 무척이나 섭섭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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