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사람들은 글렌 포드 르 잘 모르겠지만 1950년대 일련의 흥미진진한 영화에 나왔던 그는 반세기 배우 경력에 1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빅 스타였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 서울의 이 극장 저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포드의 영화를 무척이나 많이 봤다. 호감 가는 모습에 과묵하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내면 성찰적이요 터프한 주인공 역을 많이 한 포드는 드라마, 코미디, 갱영화, 웨스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나왔다. 그의 영화들은 할리웃사에 남는 걸작은 없을지 몰라도 거의 모두 재미가 있다.
포드가 지난 30일 베벌리힐스의 자택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그의 사망 소식을 TV 뉴스로 듣는 순간 내가 본 그의 많은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내 눈앞을 지나갔다.
포드의 영화 중 아마도 제일 유명한 것은 그가 2차대전에 해병으로 나갔다 제대 후 만든 ‘길다’(Gilda·1946)일 것이다. 최고급 쓰레기 같은 영화라 불리는 이 필름 느와르에서 포드는 도박사로 나온다. 그런데 이 영화는 포드보다 왕년의 섹스의 여신 리타 헤이워드의 관능미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포드의 옛애인으로 나온 헤이워드가 어깨가 훤히 드러난 끈 없는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몸을 비비 꼬아대며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춤을 추는 관능적 장면 때문에 길다는 헤이워드의 동명이 되다시피 했다.
포드의 또 다른 명화는 도심 불량학생들로 득시글대는 학교의 선생 역을 맡은 ‘폭력교실’(The Blackboard Janle·1955). 그는 여기서 이상적이나 터프한 교사로 나와 호연하는데 젊은 시드니 포이티에가 그의 제자로 나온다. 이밖에도 그의 전성기의 영화들로는 ‘몸값!’ ‘8월 보름달의 찻집’ ‘물 가까이 가지마’ ‘에디 아버지의 구애’ 및 ‘주머니에 가득 찬 기적’ 등이 있다.
이 때 만든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영화가 야수적일 정도로 잔인한 갱스터 영화 ‘빅 히트’(The Big Heat·1953·사진)와 멋있는 도덕적 웨스턴 ‘유마행 3:10 열차’(3:10 to Yama·1957)이다.
나는 프리츠 랭 감독의 ‘빅 히트’를 조선호텔 앞 경남극장에서 봤는데 어찌나 살벌한지 속이 다 얼얼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너무나 재미가 있어 끝나는 것이 서운했었다. 포드는 여기서 범죄조직에 의해 아내를 잃고 복수에 혈안이 된 형사로 나와 거의 없다시피 한 입술을 꽉 다물고 명연기를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촌티가 뚝뚝 흐르는 무지막지한 킬러로 나온 리 마빈의 잔혹한 연기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가 포드를 만난 자기 애인 역의 글로리아 그레엄의 얼굴에 다짜고짜 커피팟의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붓는 장면은 할리웃의 가장 잔혹한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유마행 3:10 열차’는 포드가 보기 드물게 악인으로 나오는 영화다. 수갑에 채인 악명 높은 무법자 포드가 작은 마을에서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순박한 농부(밴 헤플린)의 감시 하에 자기를 애리조나 유마의 법정으로 이송할 열차를 기다리는 내용인데 긴장감 가득한 빼어난 웨스턴이다. 이 영화는 러셀 크로우가 포드 역을 맡아 신판으로 만들어진다.
포드는 배우생활 후반기에 웨스턴에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주발’ ‘살아있는 가장 빠른 총’ ‘양치기들’ 등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포드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웨스턴은 영어를 못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서 “이젠 턱시도 입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웨스턴을 찬양한 바 있다.
캐나다 태생으로 어릴 때 LA로 이민 와 샌타모니카 고교서부터 시작, 브로드웨이 무대서 연기를 익힌 포드는 한번도 오스카상 후보에 못 올랐지만 믿음직스럽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품질보증의 배우여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은 대중의 배우였다.
나는 80년대 초 포드를 LA의 버몬트에 있는 한국일보 구사옥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는 자기 집에서 거주할 한식 요리사를 구한다는 내용을 신문에 내달라고 부탁하러 왔었다. 그때 포드와 악수를 못 나눈 게 아직도 섭섭하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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