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빈곤과 압제 하에서 보냈지만 청춘은 항상 아름다운 것이다. 지나온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대학생 때였다.
독문학을 공부한 나는 내 인격형성에 영향을 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지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을 연모의 마음으로 탐독했었다. 고교생 때 번역서로 읽던 이 책을 대학교에 들어가 원서로 읽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
헤세의 글은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헤매는 젊은이들의 자화상이요 길잡이였다. 나는 그의 방황과 동경, 미와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여성적인 것 궁극적으로는 모성적인 것에의 회귀 또 감성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간의 대결과 융합에 나의 혼을 맡기다시피 했었다. 특히 당시는 나와 성격이 판이한 친구 C를 막 사귀었을 때로 나는 그와 나를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 비교하면서 우정을 쌓아갔었다. 우리는 이제 나이 먹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가 됐지만 둘 다 미국에 와서도 가끔 이 책 얘기를 하면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명색이 독문학을 공부한 자로서 언젠가 꼭 한번 독일 땅을 밟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지난 1일 나의 베를린 입성은 독문학 수업 후 40여년만의 일이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보슬비 내리는 속에 프라하를 떠난 버스가 독일 국경을 통과하면서 보이는 독어로 쓴 도로표지판과 간판부터 반가웠다. 마치 내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남독의 무성한 침엽수를 바라보니 저절로 “오 탄넨바움, 오 탄넨바움”하고 콧노래가 나온다. 구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건물 모양만 봐도 구별할 수 있겠다.
베를린에 도착, 늦은 점심을 먹는데 경찰 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간다. 사이렌의 단속음이 안네 프랑크 가족을 체포하러 가던 게슈타포 차량의 그것과 똑같아 기분이 섬뜩했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베를린 시내 곳곳에 유대인 추모탑을 세웠는데 우리가 독일 의사당 라이히스탁을 보려고 지나간 동물공원에도 이 탑이 있다. 그리고 2차대전 후 패전국 독일을 적극 도왔던 미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 길도 보인다.
히틀러가 유대인 핍박의 계기를 만든 화재사건으로 유명한 라이히스탁에는 수상 관저도 있는데 가족이 사는 것은 공무와 다르다고 해서 집세를 낸다고 한다. 과연 독일사람답구나 하고 혀를 찼다.
영화에서만 보던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은 월드컵 경기를 위한 각종 공사와 각국 취재진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문은 바로 베를린 장벽 뒤의 그 누구의 땅도 아닌 땅에 서서 40여년간 조국의 분단을 상징해 왔었다. 동향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양옆으로 보리수가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운터 덴 린덴’(보리수 아래) 거리. 초현대식 건물이 양쪽에 늘어선 길을 따라 걸으며 “암 브룬넨 포르 뎀 토레 다 슈테트 아인 린덴바움” 하고 혼자 원어로 노래 불러봤다.
베를린 장벽(사진) 앞에 서니 세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 나라 사정이 서글펐다. 특히 나는 6.25로 아버지와 생이별해 분단의 의미가 남다르다. 벽은 그림과 낙서로 가득했는데 나도 ‘남북한도 이처럼 통일되기를’이라고 적은 뒤 기념촬영을 했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혼자 들른 곳이 파스빈더의 930분짜리 TV 시리즈로 유명한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 이 작품은 보려면 초인적 인내력이 필요하지만 감동적인 거작이다. 이어 버스는 완전히 거대한 샤핑몰이 되어버린 포츠담 광장을 지나갔는데 베를린 필도 여기에 있다.
베를린의 명동거리 같은 쿠어담 지역에서 혼자 피자식당 ‘일 첸트로’ 앞의 노천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시원한 독일맥주를 마시면서 바라보니 앞에 2차대전 때 폭격으로 뼈만 남은 카이저 빌헬름 교회가 서 있다. 빔 벤더스의 영화 ‘욕망의 날개’의 주인공인 중년남자 천사가 저 교회 뾰족탑 위에 앉아 분단 베를린을 내려다보면서 인간이 되기를 염원했었다.
거리를 분주히 왕래하는 사람들을 보니 케네디가 이 도시를 방문, 열광하는 시민들에게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고 연설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나도 잠깐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가 된 기분이었다.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는 베를린 테겔 오스트 공항 TV 모니터에 적힌 ‘아우프 비더젠 인 베를린’(베를린에서 다시 만나요)이라는 인사가 여객의 가슴에 미련을 남긴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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