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 때 읽은 주요섭의 두 편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와 ‘아네모네의 마담‘은 지금도 그 내용을 생각하면 가슴에서 매캐한 아쉬움의 연무가 피어오르곤 하는 작품들이다. 이 두 소설은 감정적 숨길에 앨러지를 일으키게 하는 애틋하고 소박한 연애소설이어서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내 가슴을 무척 설레게 했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모나리자 그림이 작중 중요 구실을 하는 ‘아네모네의 마담’을 읽으면서 교수 부인인 연인을 사별한 전문학교 학생보다 자기 환상적 연애감정에 빠졌던 다방마담 영숙이가 더 측은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어린 딸을 둔 미망인이 마음이 가는 남자를 두고도 재혼은커녕 연애조차 할 수 없어 생이별을 해야 하는 과거 한국의 모든 미망인들의 한숨과도 같은 것이 ‘사랑 손님과 어머니’다. 이 소설은 얼마전 작고한 신상옥 감독이 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사진)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 크게 히트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이 영화를 보면서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보고 헤어져야 하는 사랑방 손님(김진규)과 어머니(최은희)가 안타까워 안달이 났었다. 어린 딸로는 전영선이 나왔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것은 어머니가 타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피아노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치던 장면. 소설도 그렇지만 신 감독은 감상성을 잘 조절해 가며 매우 은근하고 서정적인 감정의 여운을 남기는 연출솜씨를 보이고 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한국 영화중흥기의 거목 신 감독의 대표작이다. 당시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간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및 김기영등을 오퇴르(영화작가)라 할수있다면 신상옥은 대중을 위한 오락영화에 치중한 장르 감독이었다. 그는 사극(‘연산군’), 문예영화(‘꿈’), 전쟁영화(‘빨간 마후라’), 공포영화(‘천년호’) 및 멜로드라마(‘동심초‘) 등 모든 장르를 섭렵해 가며 양질의 오락영화를 만들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나온 1961년은 신 감독의 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춘향’과 ‘연산군’과 ‘상록수’가 다 같은 해에 만들어졌었다. 당시 ‘성춘향’과 ‘연산군’의 인기는 장안의 화제였다. 나는 총천연색인 두 영화를 모두 명보극장에서 봤는데 표가 완전매진 됐었다. ‘성춘향’은 주인공들인 최은희와 김진규(둘이 역에 비해서 너무 나이가 먹어 아주머니 춘향과 아저씨 몽룡이 같았다)보다 악질 사또역의 이예춘과 방자역의 허장강의 연기가 월등하고 재미있었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가 원작인 ‘연산군’은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하는 연산군의 얘기인데 연산군역의 신영균의 연기가 뛰어났던 걸작이다. ‘연산군’은 영어자막이 없었는데도 외국인까지 관람하는 것을 목격했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부부 이상의 평생 영화동지였다. 납북, 탈출, LA 정착 그리고 귀국해 신 감독이 사망할 때까지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신 감독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LA에서였다. 지금은 없어진 웨스턴의 한 족발집에서 최은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신 감독을 봤는데 자기 트레이드마크인 색깔 있는 안경과 머플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한국일보 자매지였던 서울의 일간스포츠에 주 1회 영화기사를 송고했었다. 어느 날 신문사로 날 찾는 전화가 왔다. 신 감독이었다. 그는 내게 자기 신분을 밝힌 뒤 자기가 줄 기사가 있으니 지면을 비워놓으라고 지시성 부탁을 했다. 나는 이 사람이 훌륭한 영화인인지는 몰라도 겸손하지를 못하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뒤로 감감 무소식.
나는 신 감독이 북한을 탈출한 몇 년 뒤 LA 상공인들과 같이 평양을 방문, 조선영화 예술촬영소를 구경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안내원에게 신상옥 감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김정일 지도자가 그렇게 잘 대접해 줬는데 배반했다”면서 “잡기만 하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열을 냈다.
신상옥은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 열성과 욕심이 한국 영화의 대중화에 불길을 지폈고 또 세계화의 불씨로 기여했다. 그의 생애 후반기 꿈은 ‘징기스칸’을 연출하는 것. 그는 LA서 활동할 때도 그리고 귀국해서도 이 영화를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징기스칸’을 완성치 못한 것이리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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