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나는 대학을 나오자마자 섬마을은 아니지만 항구도시 인천에서 2년여를 총각선생 노릇을 하다가 뒤늦게 군에 나가 동해안에서 야간 보초만 서다가 제대를 했다. 해안 마을의 처녀가 서울 총각인 나를 보고 가슴을 설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난 그 때 밤바다 보초를 서면서 이미자의 이 노래를 무척이나 많이 불렀다. 공연히 가사가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시절 이 노래와 함께 내가 또 자주 불렀던 이미자의 노래가 ‘동백아가씨’다. ‘헤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피를 토해내는 듯한 곡조나 가사가 창살 없는 옥살이를 하는 졸병의 심금을 쥐어뜯었는데 해변 마을에는 겨울이면 핏망울진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펴 이 노래는 나뿐 아니라 전우들의 18번이 되다시피 했었다.
이미자의 이 노래들을 지난 토요일(15일) 저녁 다시 들었다. 우리 신문사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미자, 패티 김, 조영남의 빅3 콘서트가 열린 패사디나의 시빅 오디토리엄은 이제는 나처럼 추억이 현재보다 더 현실 같이 된 올드 팬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워커를 짚고 온 할머니도 있었다.
이미자와 조영남은 옛 목소리를 그대로 지닌 반면 패티 김은 약간 변색했는데 그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청중들은 그저 이들의 모습과 노래가 좋기만 하다는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3인은 각기 자기 히트곡과 함께 남의 노래를 독창하다가 서로 번갈아 가며 짝을 지어 이중창을 부르는가 하면 셋이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다양하게 쇼를 진행했다.
무대 매너가 화려하기는 역시 서양물 많이 먹은 패티 김. 소위 ‘뽕짝’의 대명사와도 같은 이미자는 얌전한 촌색시 모습인데 선머슴처럼 생긴 조영남이 벼락치는듯한 음성으로 열창, 쇼 분위기에 강약리듬을 불어넣었다. 쇼는 셋이 각자의 첫 히트곡을 부르면서 시작됐다.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과 패티 김의 ‘마리아’ 그리고 조영남의 ‘화개장터’는 각자의 성질과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노래들. 이미자의 뽕짝과 창을 배운 패티 김의 세미클래식 같은 가요풍 노래 그리고 조영남의 팝이 흥겨운 조화를 이룬 흐믓한 저녁이었다.
조영남은 대학시절 부른 탐 존스의 ‘딜라일라’가 빅히트를 하면서 출세길에 올랐었다. 나는 탐 존스의 노래가 장안을 뒤흔들 때 풋내기 선생이었다. 나는 그때 퇴근 후 단골 맥주 집에 들를 때마다 D.J.에게 ‘딜라일라’(Delilah)를 틀어달라고 부탁해 내가 술집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웨이트리스들이 “딜라일라 아저씨 오신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매우 좋아한다. 조영남은 역시 탐 존스의 노래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도 훔쳐(?) 불러 빅히트를 했었는데 그는 이번에 이 두 곡을 모두 열창, 파르스름하던 나의 젊음을 그립게 만들어 놓았다. 내 뒤에 앉았던 아주머니도 조영남의 팬인지 “영남이 오빠~” 하며 좋아한다.
이미자가 ‘황혼의 블루스’를 부르면 패티 김은 ‘4월이 가면’을 불렀고 조영남은 ‘그대 그리고 나’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며 따라 부르는 청중들과 마음을 같이했다. 빅3는 ‘길 잃은 기러기’ ‘사랑은 영원히’ ‘사랑했어요’ ‘백치 아다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틸’ ‘지금’ ‘향수’ 그리고 ‘금강산’등 귀에 익은 히트곡들을 줄줄이 불러댔다. 유감은 패티 김의 ‘초우’를 못 들은 것. 이 날 팬들도 패티 김에게 이 노래를 부탁했지만 그녀는 다음에 만날때 불러주마고 미루었다.
이번 공연의 어릿광대는 조영남. 익살꾼인데 두 누나 미자와 패티가 동생 영남이를 놀려대면 영남이는 이에 능청맞게 대응,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미자는 무대에서 자신과 패티 김 언니가 올해로 가수생활 47년째를 맞는다고 알려줬다. 반세기를 노래로 세상을 살아온 두 여인은 한국의 국보라고 해도 되겠다.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면서도 세월과 인기의 무상함이 연결 지어지며 가슴 한 구석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팬들의 “사랑해요”에 “사랑합니다 여러분”으로 답하며 서로 작별인사를 주고받은 쇼는 ‘사랑해 당신을’을 모두가 합창하면서 끝났다. 너도 울고 나도 울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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