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사진)하면 언뜻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볼 때마다 내 속을 산성화시키는 못 이룰 사랑의 이야기 ‘짧은 만남’(Brief Encounter·1945)은 영화 내내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로맨틱하면서도 영혼을 짓누르는 비감한 멜로디 때문에 시적 아름다움을 갖추게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데이빗 린이 감독한 이 흑백 소품은 기차역에서 만난 두 평범한 유부남 유부녀의 짧은 만남의 이야기다. 영화는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사랑하게 된 남자를 만나고 온 날 크로스워드 퍼즐을 푸는 남편 앞에서 뜨개질을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여인은 “나같은 보통 사람에게 그런 폭력적인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독백하는데 이 때 리빙룸에 놓인 축음기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이 협주곡이 흘러나온다. 이 곡은 그 뒤로도 계속해 들려오면서 두 연인의 있을 수 없는 사랑을 하소연한다.
슬픔의 엄습을 멜로디의 묵화로 그려 놓은 듯한 이 음악은 철두철미한 낭만파인 라흐마니노프의 내성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그의 음악 중에서 팬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신열을 앓는 서정성과 멜랑콜리가 깃든 열정 그리고 크게 빗질해 대는 듯한 멜로디를 지닌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성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가슴을 다 풀어헤친 곡이다.
20세기에 활동했으면서도 철저히 현대음악을 배척하고 로맨티시즘을 고수한 마지막 낭만파인 그의 음악은 나같은 센티멘탈리스트가 듣기에 딱 좋다.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의 어머니는 슬픔’이라고 말했듯 그의 음악은 슬퍼서 좋다.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마지막 악장이 끝나면서 느끼는 황홀감은 실컷 울고 난 듯한 카타르시스의 소산이다. 사람 마음 휘모는데 이보다 더한 음악도 없다.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증에 빠져 3년간 작곡생활을 중단했다가 지은 첫 곡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제1번 교향곡이 비평가와 청중들로부터 몰매를 맞자 속병에 걸려 작곡을 못했다. 그를 치료한 의사가 최면술 요법을 사용한 니콜라스 달인데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달에게 바쳤다. 그러니까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치유곡인 셈이다.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여는 피아노 솔로와 곧 이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연상케 한다. 라흐마니노프가 우상으로 여긴 사람이 차이코프스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닌데 우수와 정열로 찬 휩쓰는 듯한 멜로디가 표현하는 가슴 앓는 서정성으로 채색된 첫 부분은 두 협주곡이 똑 닮았다.
이 협주곡은 21세의 리즈 테일러가 나오는 로맨스 영화 ‘라프소디’(1954)에서도 중요하게 쓰이는데 라흐마니노프가 골수 낭만파여서 그의 음악은 로맨스 영화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또 다른 로맨틱한 곡으로 얼마전 사망한 크리스토퍼 리브와 제인 시모어가 나오는 비극적 사랑의 영화 ‘시간 너머 어느 곳’(Somewhere in Time·1980)에 쓰인 것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이 영화는 젊은 극작가와 아름다운 여배우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는 상사병 영화로 변주곡의 테마가 로맨틱하고 슬픈 분위기를 잘 어루만져주고 있다.
올 라흐마니노프(라크)로 짜여진 프로그램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약물에 취해 가슴이 후줄근하게 녹초가 되는 행위이다. 지난 일요일(9일)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열린 LA필의 올 라크 연주는 간드러지게 예쁜 보칼리즈로 시작됐다.
다음 곡이 피아노협주곡 제2번. 원래 이 날 피아노는 미녀 프랑스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가 칠 예정이었으나 아파 못 나오고 대신 안드레 와츠(그의 리사이틀이 21일 하오 3시 세리토스 공연센터서 열린다)가 쳤다. 나는 손이 커 한꺼번에 피아노의 9음계를 짚을 수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이 곡을 여성이 어떻게 해석하는가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그리모를 못 들어 유감이었다. 거대한 체구의 와츠는 큰 제스처로 건반을 마구 두들겼는데 다소 지나치게 정열적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장내는 마치 록 콘서트장처럼 기립박수와 환성과 휘파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지막 곡이 침울하고 로맨틱한 스케일 큰 교향곡 제2번. 제1번이 준 스트레스로 제2번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19세기 것이라고 해야 좋을 이 교향곡의 제3악장은 혼절할 만큼 아름답다. 이 날 지휘는 파보 예르비였는데 좀 냉담했다.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박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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