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배심원 후보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LA 다운타운의 형사법정에 출두, 진짜로 미국적인 경험을 했다. ‘배심원은 당신의 특권이요 막중한 책임이자 훌륭한 시민의 표시’라고 하지만 막상 출두 통지서를 받고 나면 대부분 인상을 쓰게 마련이다.
꼭두새벽부터 법정에 나간 첫 날은 법원 직원의 오리엔테이션 후 하루종일 호명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늦게 호명이 돼 124호 법정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나는 대기석에서 기다리다 그 날은 허탕을 치고 귀가했다.
이튿날 다시 출두해 하오 2시가 돼서야 내 이름이 호명됐는데 124호 법정에 들어간 후보의 총수는 34명. 나는 이 날 영화에서만 보던 배심원 선정과정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다고 느꼈다.
판사석에는 금발에 참하면서도 존엄성을 지닌 여판사 주디스 샴페인이 앉아 있었고 그 앞의 변호사석에는 동양계 젊은 여변호사와 피고인 머리를 깎은 라티노 청년 로베르토 토레스가 그리고 검사석에는 백인 검사가 앉아 있었다.
샴페인이 먼저 배심원석에 앉은 12명의 후보들에게 배심원의 임무와 절차를 설명한 뒤 토레스는 중범 전과자로 총기 소지죄로 기소가 됐는데 본인이 증언을 포기했다면서 재판은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절대로 당신들 나름대로 추리나 상상을 하지말며 증거와 증언에 따라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어 유죄가 인정되기 전까지는 피고는 무죄임을 잊지말 것”을 당부했다.
이어 샴페인의 각 후보들에 대한 질문(심문이라는 게 더 적당하다)에 들어갔다. 개인들에 대한 경력과 신상문제를 미주알고주알 식으로 캐물으니 후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 애인이 2년전 권총강도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여자, 음주운전으로 걸렸을 때 셰리프에게 구타당했다는 남자, 마약 소지로 체포됐다는 사람, 권총을 3개나 갖고 있다는 동양계 남자를 비롯해 어떤 사람은 자기 여동생이 어렸을 때 성적으로 유린당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샴페인은 가끔 시치미 뚝 떼고 농담을 해 딱딱한 분위기를 녹여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치과기공사인 한국 여자와 수퍼마켓서 케이크 데코레이터로 일한다는 동양계 남자가 영어 미숙으로 면제를 받았다. 그 빈자리를 대기석에 앉아 기다리던 다른 후보가 채우면 판사는 그 사람에게 또 같은 절차를 적용하는 식.
일단 판사의 질문이 끝나니 이번에는 변호사와 검사가 번갈아 가며 후보들 하나 하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마친 뒤 변호사와 검사는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은 후보를 솎아냈다. 그 자리를 또 다른 대기후보가 채우고.
나는 신문사에서 할 일이 많아 도저히 시민의 이 훌륭한 권리를 행사할 여유가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모면할까 고심하다가 변호사나 검사가 원치 않는 말을 하면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돼 배심원석에 앉은 나는 내 집안 얘기와 과거를 낱낱이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의 “당신 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총기규제안의 강력 지지자요 총을 증오한다”고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더니 변호사가 판사에게 나를 솎아내겠다고 통보, 나는 가뿐한 기분으로 퇴정했다.
내가 이번 경험에서 느낀 것은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점과 백인들의 시민의식이었다. 이들은 물론 영어가 모국어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배심원석에 앉더니 모두들 배심원이 하고싶어 못 견디겠다는 식으로 진지한 발언을 하고 태도를 지었다. 난 속으로 감탄했다. 배심원 제도는 일반인의 상식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훌륭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LA 폭동의 원인이 된 로드니 킹 재판과 O.J. 심슨 재판 같은 불상사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제도는 판사가 혼자 유무죄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낫다.
배심원이라는 제목을 했지만 내용은 1인 터미네이터의 활약을 그린 영화가 ‘아이, 더 주어리’(I, the Jury)다. 이 영화는 범죄소설 작가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이 원작. 거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자기 친구의 살인자를 찾아 단독 배심원 노릇을 하면서 시체가 즐비하게 쌓인다.
배심원에 관한 진짜 걸작영화는 헨리 폰다가 나오는 ‘12명의 분노한 남자들’(12 Angry Men·1957). 부친살해 혐의로 기소된 푸에르토리칸 틴에이저에 대해 배심원들은 처음에 11대1로 유죄평결을 내린다. 그러나 혼자 무죄를 주장하는 폰다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배심원들이 격론 끝에 무죄평결을 내리는 배심원제에 대한 기소이자 찬사인 명화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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