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로 ‘오퇴르’(Auteur)는 작가를 말하는데 이 단어는 요즘 영화언어로 자기 소신과 비전을 영화에 반영시키는 감독을 일컫는다. 이 말은 프랑스 누벨 바그의 기수 중 한 사람으로 평론가 출신의 감독 고 프랑솨 트뤼포에 의해 정형화 됐다. 오퇴르라는 말을 듣는 감독들은 대부분 자기가 각본을 쓰고 연출하는 아트 하우스 영화인들이다.
한국의 대표적 오퇴르를 들라면 김기덕과 홍상수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영화는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사랑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의 영화가 매년 칸 영화제에 초청 받고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는데 김기덕은 언젠가 내게 “제 영화는 한국에서는 안 봐요”라고 반투정을 한 적이 있다.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극장전’은 프랑스의 MK2와 공동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감독도 이 둘인데 둘 중에서 홍상수(45)가 더 내 마음에 든다. 나는 그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최신작인 ‘극장전’(Tale of Cinema·사진)까지 그의 영화 6편을 모두 다 봤다. 그의 영화를 처음 극장서 본 것이 토론토영화제에 나온 흑백 ‘오! 수정’(2000)이었다. 이 영화는 숫처녀 수정을 사랑하는 두 남자가 제 나름대로 묘사하는 수정에 관한(처녀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얘기로 실험정신이 강하다. 나는 초기 고다르의 영화를 많이 닮은 이 우습고 신선한 영화를 보면서 홍상수에게 매력을 느끼게 됐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떻게 보면 모두 별 볼일 없는 얘기들이다. 즉 우리 주변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상생활의 얘기다. 그의 영화의 대사나 배우들도 모두 우리가 버리다시피 하는 일상 대사요 길가다 만난 행인들과 같다.
그런데 그는 이런 구태의연한 일상을 재치있고 예지롭게 팽이처럼 돌려가며 새롭고 통찰력 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지녔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인데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매번 감탄하고 놀라는 까닭은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은 이런 상식적인 것들의 진면목을 깨우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홍상수의 큰 주제들인 사랑의 가변성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음에의 집착을 좋아한다. 그는 이 주제를 영화에 자주 사용하면서 주인공들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하게 만드는데 묘한 것은 홍상수의 작품속 진짜 주인공은 여자라는 점이다. 홍상수야말로 여자없으면 못사는 남자로 그의 영화에서는 늘 여자가 결단력 있고 남자는 연골동물처럼 나온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라는 영화 제목이 나올 만도 하다. 이 영화 역시 두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린 것으로 홍상수의 모든 다른 영화들 처럼 흐지부지하게 끝난다. 홍상수의 영화는 늘 결말이 우리 실제 삶처럼 막연하다.
이런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홍상수가 프랑스 누벨 바그의 또 다른 기수 중 하나인 노장 에릭 로머(클레어의 무릎)를 닮았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여자 심리 꿰뚫어보는 데는 로머 만한 감독이 없다. 그리고 로머의 영화는 자연스런 연기와 대사로 유명하다. 어찌 보면 홍상수와 로머의 대사들은 하찮은 것 같지만 그 안에 귀중한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
‘생활의 발견’(2002)과 ‘극장전’(2005)에서 볼 수 있듯이 홍상수는 사랑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는 그것이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잘 알아 자꾸 애인보고 같이 죽자고 조른다. 영화에 바치는 헌사이자 현실과 허구의 즐거운 유희인 ‘극장전’에서 주인공 김동수(김상경의 어눌한 연기가 좋다)는 최영실(엄지원이 참한 게 예쁘다)에게 여관방에서 “우리 6개월만 같이 살다 죽자”고 제의한다. 그러면 진짜로 사랑할 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상수가 생각하는 사랑의 생명은 6개월 정도인데 사랑을 못 믿는 내가 봐도 그건 조금 짧다. 그의 영화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이런 탓이겠다. 나는 홍상수가 과거에 아마도 사랑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죽음을 생각했던 것이나 아닐까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우연이 자주 계기를 만드는 홍상수의 영화 속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담배 태우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말들이 많은데 때로는 그의 삶과 사랑에 대한 회의에서 퇴폐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의 예지의 팽이를 돌려 이런 퇴폐성을 백합처럼 순수하게 벗겨놓는다면 좋겠다.
나는 홍상수가 문소리를 써서 영화를 한번 만들면 아주 좋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둘이 상통하는 게 있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홍상수와 마주앉아 소주나 마시며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 옆에 문소리가 있으면 더 좋고.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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