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의 막판 뒤집기
5일 거행된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서 ‘크래쉬’(Crash)가 예상을 뒤엎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치고 작품상을 탄 것은 지난 1998년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가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을 누르고 작품상을 탄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기자를 비롯해 전미비평가들이 우승을 점쳤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탈락은 겉으로는 진보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할리웃이 아직도 내면적으로는 보수성을 못 버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6,500명에 달하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대다수가 나이를 먹은 층으로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을 지지할 지는 몰라도 아직 게이 카우보이 로맨스를 포용할 만큼 진보적인 가슴을 갖지는 못했다고 봐야 한다.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 중 여럿이 동성애라는 내용 때문에 이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의 벽이 참으로 높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이 ‘브로크백 마운틴’ 대신 고른 ‘크래쉬’는 LA의 다인종들간의 인종차별을 다룬 것이어서 절대 다수가 LA에 살고 있는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는 남의 얘기 같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때 한 밤에 할리웃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계기로 앙상블 캐스트가 여러 갈래의 얘기를 모자이크하는 인종차별과 불관용과 편견 그리고 용서와 구제에 관한 전형적 할리웃 스타일의 멜로 드라마다.
백인과 흑인, 차이나맨과 이란인 그리고 한국인 등이 나와 인간 드라마를 엮는 ‘크래쉬’는 앤젤리노들에게는 사실감이 큰 영화로 전체적으로 암울하고 비극적이나 궁극적으로는 변화 가능성을 지닌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의미와 재미를 공유했지만 우연과 상투적인 것이 많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작품으로 예술성과 금기타파 면에서 결코 ‘브로크백 마운틴’을 따라 올 수는 없다. 이 영화로 각본상을 탄 캐나다 태생의 폴 해기스는 지난해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도 각본상을 탔었는데 ‘크래쉬’가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지난해 5월에 개봉된 ‘크래쉬’는 이미 DVD로 나와 있는데 작품상 수상을 기념해 6일부터 극장서 재상영한다.
예상대로 이긴 하지만 앙리의 감독상 수상은 오스카 사상 또 하나의 신기록이다. 그는 아시안뿐 아니라 비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스카 감독상을 탔다. 한국계를 비롯해 할리웃 곳곳에서 일하는 아시안들에게는 낭보로 인종차별 국가인 미국이지만 능력만 있으면 으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쾌거다.
앙리는 흑인 영화인들에 비하면 굉장히 빨리 할리웃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편이다. 그가 할리웃의 눈길을 끌게 한 영화가 지난 1993년에 만든 두 번째 작품 ‘결혼 잔치’(The Wedding Banquet). 그 뒤로 13년만에 영화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거머쥔 것이다.
지난 2001년 할리 베리가 ‘몬스터스 볼’로 아카데미 사상 최초의 흑인 여자주연상을 탄 것이나 같은 해 덴젤 워싱턴이 ‘트레이닝 데이’로 1963년 시드니 포이티에가 ‘들에 핀 백합’으로 최초의 흑인 남자주연상을 탄 후 첫 주연상을 받은 것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성장이다. “이 영화는 게이 영화가 아니라 사랑의 위대함을 말한 영화다”라는 앙리의 수상소감이 인상적이다.
나는 앙리를 세 번 정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늘 수줍어하는 눈동자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소곤대듯 말을 하는 겸손한 사람이다. 무협영화 ‘와호장룡’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세기 초 영국의 사회풍습과 청춘남녀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 ‘이지와 감정’과 1970년대 미국 중류층 가정의 퇴폐상을 그린 ‘아이스 스톰’ 등 어떤 내용이든 잘 소화하는 탁월한 감독이다. ‘헐크’로 헛발을 짚은 적은 있지만 앞으로 한 두어번은 더 오스카상을 탈 실력자다.
그가 차기 작으로 만들 레즈비언이었던 영국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자전적 삶이 기대된다. 스프링필드는 ‘유 돈 해브 투 세이 유 러브 미’로 한국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가수로 1999년 59세로 사망했다. 스프링필드역에 오스카상을 탄 샬리즈 테론이 선정됐다고 하는데 앙리와 테론의 실력이면 또 한번의 오스카를 노릴 만하다.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사회를 본 이번 오스카 쇼는 ‘크래쉬’의 역전승과 영화 ‘허슬 앤 플로우’의 주제가 랩송 ‘핌프 노릇하기 힘드네’가 상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지독히 평범하고 지루한 쇼였다. 남녀 주조연 등 수상자들은 전부 예상대로였고 따끔한 정치풍자로 잘 알려진 스튜어트의 진행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신랄한 위트나 유머가 아쉬웠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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