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성배’라 불리는 바그너의 위대한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사이클로 관람하는 것을 성배에 가득 찬 포도주 한 잔 마시는 것에 비유한다면 나는 지난 주말 성배 반 잔의 포도주를 마신 셈이다. 지난 21일과 22일에 걸쳐 롱비치 공연예술센터의 센터 극장에서 공연된 롱비치 오페라의 반쪽짜리 ‘링’ 사이클을 관람한 것은 취기가 감도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바그너가 수십년간에 걸쳐 작곡한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ebelungen)는 ‘라인골트’(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ure), ‘지크프리트’(Siegfried) 및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등으로 된 공연시간 16시간짜리의 초인적 작품이다. 보통 나흘에 걸쳐 공연되는데 롱비치 오페라는 이번에 이것을 9시간짜리 축소판으로 무대에 올렸다. 영국 작곡가 조나산 도이가 절반을 자른 것인데 음악과 영어 대사로 된 드라마의 흐름에 무리가 없는 정열적이요 진지한 공연이었다.
프로그램 북에서도 말했듯이 ‘링’ 사이클은 권력욕 대 사랑의 힘의 대결의 얘기다. 북구의 신화를 바탕으로 바그너가 쓴 글은 권력과 탐욕, 사랑과 질투, 선과 악, 야망과 음모와 배신, 살육과 근친상간 및 운명과 자유의지 그리고 자기 희생과 구원의 드라마다. 한마디로 말해 세상사 모든 일. 그런데 악극에서는 이런 일들을 인간뿐 아니라 신들도 함께 저지른다.
모든 불상사는 신들의 왕인 보탄(바그너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탓에 일어난다. 보탄은 인간 못지 않게 탐욕스럽고 부정직한데 그가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저주받은 황금반지를 탐하면서 불난리 물난리가 난다.
센터 극장은 840석의 소규모 극장인데다 25명으로 된 오케스트라는 검은 투명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무대 뒤에 배치돼 ‘링’을 안방극장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매우 직접적이고 가까운데 맨 앞자리서 본 친구 C는 “하겐(지크프리트 킬러)이 휘두르는 창에 찔릴까봐 겁이 나더라”고 농담했다. 롱비치 오페라의 예술감독 안드레아스 미티섹이 지휘했는데 정성을 다한 연주이긴 했으나 미티섹이 음을 리드한다기보다 급히 따라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추상적이라 할만한 세트는 전 공연을 통해 몇개의 소품만 바뀌고 시종일관 붉은 모래가 깔린 무대 위의 맷돌 같은 커다란 디스크 하나가 전부. 이 디스크는 남매인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의 정사 침대에서부터 산과 지크프리트의 시체를 화장하는 장작더미 등 모든 구실을 했다. 그런데 서툰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의상은 남의 학예회에서 입다 버린 것처럼 허술했다. 이런 여건인데도 음악과 드라마가 유연하게 진행되는게 신기했다.
노래들은 모두 썩 잘 불렀다. 가수들은 다 다른 오페라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 특히 지크문트역의 게리 레만과 지크프리트역의 댄 스나이더 그리고 지클린데역의 캐런 드리스콜과 봉술하는 브륀힐데역의 디드라 팔머 고튼의 노래가 출중했다. 시종일관 고함을 지르듯 음성의 높이와 폭과 양을 최대한으로 구사해야 하는 바그너의 노래는 부르는 사람뿐 아니라 듣는 사람도 녹초로 만들어 놓는다. 공연시간이나 드라마와 음악의 복잡성 때문에 그의 ‘링’ 사이클은 ‘인내시험’이라 불리는데 그래서 나도 도 닦는 마음자세로 극장엘 갔었다.
내가 음악과 드라마의 결정판인 ‘링’ 사이클을 처음 본 것은 10여년전 아들과 함께 애리조나 플래그스탭에서였다. 휴가를 내 1주일에 걸쳐 봤는데 사전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대학 강당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5시간씩 구경하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비록 반쪽짜리 사이클이긴 하지만 감동하면서 만족스럽게 즐겼다. 아내와 함께 사이클을 여섯번이나 본 ‘링헤드’(사이클 공연을 따라 세계를 도는 팬들)인 친구 C로부터 그동안 여러 차례 바그너 교육을 받은 데다 내 나름대로 CD로도 듣고 또 공부도 해 다소 익숙해진 탓인가 보다. 9시간이 라는 짧은(?) 공연시간도 내 기쁨에 일조를 한 셈.
나는 이번 미니 사이클을 오는 10월 코스타메사에서 있을 러시아의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하고 연출하는 마린스키극장 오페라의 ‘링’ 사이클 공연관람을 위한 예습을 겸해 봤다. 공연이 끝나자 C는 “‘링’은 볼 때마다 매번 해석을 달리할 수 있어 자꾸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내 아내가 “저는 오는 10월의 ‘링’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쌓여요”라고 불경스런 대꾸를 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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