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통인 내 친구 C는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을 ‘하나의 긴 미사’라고 표현한다. 그의 말처럼 이 오페라는 하나의 성극이자 종교극이라 하겠다.
음악과 대사와 내용이 모두 영적인데 바그너는 이 오페라를 바이로이트에서 초연할 때 ‘참회의 종교적 의식’이라며 관객들에게 박수를 치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베를린서 이 오페라를 본 친구는 박수를 치는 관객을 다른 관객이 말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들려주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음악과 내용이 매우 복잡하고 길어(현재 로스앤젤레스 오페라가 공연중인 ‘파르지팔’은 공연시간이 3시간45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준비 없이 입장했다가는 고문당하는 느낌을 갖기 십상이다. 나는 이 오페라를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봤는데 그 때 사전 준비 없이 만복에 마티니 두 잔을 마시고 관람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이번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공연도 친구와 함께 관람했는데 이번에는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한 탓인지 크게 감동했다. 지난해 본 ‘트리스탄과 이졸데’ 때처럼 영적 경험을 느끼면서 왜 친구가 바그너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파르지팔’은 성경 내용과 중세 전설을 섞은 것이다. 중세 전설은 카멜롯의 아서 왕과 그의 원탁의 기사들 얘기다. 그래서 이 내용을 미리 알고 보면 오페라 이해에 도움이 된다.
몬살바트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 쓴 성배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지키는 암포르타스 왕과 구르네만츠 등 기사들은 카멜롯의 아서 왕과 기사 갤라하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암포르타스는 기사 자격을 박탈당한 뒤 마법사가 된 클링조르를 무찌르려다 오히려 창에 자기 옆구리를 찔리고 창도 빼앗긴다. 이 창은 아서 왕의 엑스캘리버인 셈인데 나는 클링조르를 가롯 유다로 봤다. 그리고 클링조르의 마법에 걸려 기사들을 유혹하는 쿤드리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면 된다.
오직 창에 의해서만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암포르타스를 위해 창을 클링조르로부터 빼앗아 왕의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이다. ‘자비에 의해 깨어난’ 파르지팔은 성배를 지키다 그것의 주인이 된 원탁의 기사 퍼시발이다. 구원은 아이처럼 순수하고 순진한 자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도 성서적이다.
퍼시발의 얘기는 에릭 로머의 연극 같은 영화 ‘웨일즈의 퍼시발’과 내용을 현대화 한 로빈스 윌리엄스와 제프 브리지스가 나온 ‘피셔 킹’에 의해서도 묘사된 바 있다.
‘파르지팔’은 대사와 음악, 드라마와 시각예술이 혼연일체를 이룬 소위 바그너의 악극을 일컫는 ‘게잠트 쿤스트베르크’(종합예술)의 전형적 작품이다. 이 오페라는 그냥 음악만 들어도 좋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음악이 서사시적이요 웅장하고 또 아름다우며 영혼의 명징함을 지녀 노래 없이 음악만으로도 자주 연주되고 음반도 많다.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빛나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느리고 명상하는 듯한 것이 저세상적으로 극의 흐름과 내용을 잘 받쳐주었다. 거룩하고 영롱한 서곡 도입부의 금관악기 음들은 옛날 한국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클래시컬 음악시간의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됐었다.
미니말리스트인 로버트 윌슨이 디자인한 무대장치는 지극히 생략적이어서 무대가 텅 빈 듯했다. 그리고 일본 의상을 본뜬 듯한 흑과 백과 청색의 의상을 입고 얼굴에 흰 분장을 한 가수들의 느리고 단절된 제스처는 마치 무언극이나 인형극을 보는 느낌을 주었다. 불모의 무대를 선별적으로 강렬하게 부각시킨 조명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윌슨의 이같은 제작이 신성하고 신비한 내용에 썩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볼륨과 아름다운 음성을 그대로 지닌 파르지팔역의 도밍고의 노래는 강렬하고 감수성 가득했다. 단지 ‘순수한 바보’ 노릇하기엔 그가 너무 늙었는데 그래서 LA타임스의 마크 스웨드는 그를 ‘늙은 바보’라고 평했다. 구르네만츠와 클링조르역의 마티 살미넨과 하트무트 벨커도 좋았는데 특히 살미넨의 노래가 가슴에 와 닿았다.
반면 쿤드리역의 린다 왓슨은 볼륨은 풍성했으나 감정의 기복이 빈약해 무덤덤한 느낌. 그러나 쾌락적인 2막의 쿤드리와 파르지팔의 긴 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나는 관람 며칠후 친구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그는 바그너 황무지인 LA에서의 새로운 연출 시도에 대해선 칭찬했으나 전체적으로 탐탁치가 못하다는 답을 보내왔다. 오페라를 보면서 나는 도대체 인간적으로 괴물이었던 바그너가 어떻게 이런 자비와 속죄, 믿음과 구원에 관한 위대한 음악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천재는 비인간적인 것을 보상할 수 있는 것인가. 11, 14, 17일 세 차례 공연이 남았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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