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LA 영화비평가협회(LAFCA)는 매년 연말이면 그 해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 각 부문 베스트를 뽑는다. 올해는 오는 10일에 모임이 있는데 LA타임스, 월스트릿 저널, USA투데이, 타임 및 뉴스위크 등의 내노라 하는 비평가들이 투표 전 열띤 논의를 한 뒤 각자 자기의 베스트를 발표하는 과정이 매우 진지하고 스릴마저 있다.
이 모임이 있기 전 또 다른 모임에서 우리는 매년 생애업적상 수상자를 투표로 뽑는다. 영화계에 지대한 공로를 남겼으나 세월에 묻혀 잊혀졌거나 상복이 없는 사람을 골라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먼저 회원들이 서로 업적상 후보자를 거명한 뒤 거수투표로 과반수를 얻은 사람이 수상자로 선정되는데 올해 우리가 뽑은 사람은 배우 리처드 위드마크. 나도 투표에서 위드마크에게 한 표를 던진 터여서 그가 뽑힌 것이 흡족했다.
퀭한 눈과 수척한 얼굴에 마른 몸매를 한 위드마크 하면 대뜸 악인이 생각나는 까닭은 그의 데뷔작 느와르 스릴러 ‘죽음의 키스’(Kiss of Death·1947) 때문이다. 위드마크는 여기서 타미 유도라는 이름의 뉴욕 범죄단 두목으로 나온다.
중절모에 코트를 입은 유도는 밀고자 아들의 행방을 밝히지 않는 휠체어에 앉은 부인을 의자와 함께 전기코드로 묶은 뒤 층계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밀어 뜨려 죽여버리면서 낄낄대고 웃는다. 피골이 상접한 얼굴의 위드마크가 미치광이처럼 눈알을 굴려가며 하이에나의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웃는 모습은 정말 꿈에 볼까 두려운 것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위드마크는 대뜸 오스카 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스타가 되었다. 몸에 꼭 끼는 드레스를 입은 마릴린 몬로가 탐스런 엉덩이를 좌우로 돌려가며 걸어 ‘몬로 워크’를 과시한 것만큼이나 유명한 킬러의 웃음이었다.
미네소타 태생으로 오는 26일로 92세가 되는 위드마크(그는 전 LA 다저스의 명투수 샌디 코팩스의 장인이다)는 일리노이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을 다닐 때 연극에 취미를 붙였다. 대졸 후 뉴욕으로 가 라디오 드라마와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위드마크는 유도역 때문에 한동안 악역 단골이었으나 곧이어 배역의 폭을 넓혀 정의로운 영웅과 악인역을 고루 해냈다. 영웅이든 악인이든 간에 그의 역은 늘 강인하고 고지식하며 의식 있는 고독자의 모습이었다.
연기생활 40여년간 일관성 있는 연기로 할리웃서 장수를 한 위드마크는 범죄, 전쟁(프로그멘), 웨스턴, 모험(몬태나의 붉은 하늘), 코미디(사랑의 터널) 등 다양한 장르에 나왔다. 그 중에서도 그가 많이 나온 영화는 범죄영화와 웨스턴.
그가 나온 느와르 스릴러 중에서 뛰어난 것은 ‘밤과 도시’(Night and the City·1950). 줄스 다신이 감독하고 진 티어니가 공연한 이 영화에서 위드마크는 런던의 지하세계서 성공하려고 몸부림치는 서푼짜리 미국인 사기꾼으로 나온다. 이보다 더 멋진 것은 샘 훌러가 감독한 ‘사우스 스트릿의 소매치기’(Pickup on South Street·1953). 우연히 국가 기밀이 든 필름을 손에 쥐게 된 소매치기가 스파이에게 쫓기는 멋있는 영화인데 창녀 역의 진 피터스가 곱다.
위드마크가 나온 웨스턴들로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각색한 ‘부러진 창’(Broken Lance·1954), 게리 쿠퍼와 공연한 ‘악의 화원’(Garden of Evil·1954), ‘마지막 포장마차’(The Last Wagon·1956), 로버트 테일러와 공연한 ‘법과 잭 웨이드’(The Law and Jack Wade·1958) 그리고 올스타 캐스트의 ‘왈록’(Warlock·1959) 및 존 웨인이 감독한 ‘알라모’(1960) 등이 있다. 알라모에서 위드마크는 칼 잘 쓰는 짐 보위로 나왔다. 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왈록’이다. 헨리 폰다와 앤소니 퀸이 공연한 어른들을 위한 의미심장한 웨스턴이다.
위드마크는 매우 사적인 사람으로 평소 자기 선전을 싫어했다. 그는 1971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배우는 자기 일만 하고 입은 다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위드마크는 그런 탓에 훌륭한 배우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를 못했다.
나는 내년 1월 LAFCA가 마련하는 베스트들을 위한 파티에서 위드마크를 만나면 내가 소년시절에 그의 영화를 본 경험을 얘기하고 악수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당초 살고 있는 코네티컷에서 LA로 날아오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뒤늦게 건강 때문에 참석치 못하게 됐다고 통보해 왔다. 진짜로 섭섭하기 짝이 없다.
한편 폭스(Fox)는 최근 ‘죽음의 키스’와 함께 2편의 멋있는 느와르 스릴러 ‘어두운 코너’(The Dark Corner·1946)와 ‘보도가 끝나는 곳’(Where the Sidewalk Ends·1950)을 DVD로 출시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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